“예산이 남아서”… 약속 깨고 국경 장벽 다시 짓는 바이든의 변명

입력
2023.10.06 16:30
미국 정부, 추가 건설 위해 환경법 우회
“중단” 공약 철회… 이민 급증에 고육책
‘추방’도 재개… 트럼프 “사과 기다릴게”

“예산이 남았는데, 의회가 다른 용도로 못 쓰게 해서….”

취임 당시 약속을 어기고 남부 국경 장벽을 다시 짓기로 결정한 배경을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이렇게 설명했다. 중남미발(發) 불법 이민자를 막는 거대한 장벽은 애초 그가 진지하지 않다고 폄하한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 아이디어였다. ‘효과가 있으리라고는 여전히 믿지 않는다’며 불편한 속내를 숨기지 않은 이유다.

미국 국토안보부는 5일(현지시간) 텍사스주(州) 리오그란데 밸리에 국경 장벽이 추가 건설될 수 있도록 26개 연방법 적용을 유예한다고 발표했다. 우회 대상은 청정대기법, 식수안전법, 멸종위기종법 등 환경·보존 관련 법들이다. 알레한드로 마요르카스 국토안보부 장관은 성명에서 “불법 입국을 막기 위해 국경 인근 물리적 장벽 건설이 시급하다”고 강조했다.

사실 바이든 대통령 입장에선 고육책이다. 국경 장벽이 전임자 유산인 탓이다. 트럼프 행정부는 멕시코 접경지대에 450마일(724㎞) 길이의 장벽을 건설했다. 그러나 바이든 대통령은 2021년 1월 취임 첫날 이를 중단시키고 임기 내 추가 건설도 없을 것이라고 공언했다. “진지한 정책적 해법이 되지 못한다”는 이유였다. 하지만 2년 9개월 만에 약속을 깼고, 미국 뉴욕타임스는 “바이든 행정부가 강경한 장벽 확장 반대 노선에서 한발 물러섰다”고 평가했다.

핵심 사유는 이민자 급증이다. 국토안보부는 연방정부 공보 공지에서 “불법 국경 유입이 행정부가 손쓰기 힘들 정도로 늘었다”고 토로했다. 실제 올 9월까지였던 2023 회계연도 동안 24만5,000명의 불법 이민자가 리오그란데 밸리 국경순찰대에 적발됐다. 특히 최근 몇 달간 이민자 수가 더 늘면서 이민 문제를 내년 11월 대선의 핵심 쟁점으로 정한 공화당 경선 주자들의 질타가 바이든 대통령에게 쏟아졌다. 심지어 ‘이민자 쓰나미’에 몸살을 앓는 뉴욕시의 에릭 애덤스 시장 등 집권 민주당 내 인사마저 백악관의 소극적 대응에 불만을 감추지 않았다.

하지만 바이든 대통령은 화살을 의회로 돌렸다. 이날 백악관에서 취재진에게 “국경 장벽용으로 정해진 예산 명목을 바꿔 보려 했으나 의회가 승인하지 않았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며 “배정된 대로 돈을 써야 한다”고 말했다. 워싱턴포스트는 “바이든 대통령은 자세한 설명이 없었고 질문도 받지 않았다”고 전했다. 미국 정부에 따르면 2019 회계연도의 리오그란데 밸리 장벽 할당 예산 13억5,000만 달러(약 1조8,200억 원) 중 2억 달러가 남았고, 지난달 말까지 이를 써야 했다. 다만 그는 ‘장벽이 효과적이라고 보느냐’는 질문에는 “아니다”라고 답했다.

트럼프 전 대통령은 유력한 대권 경쟁자의 곤경을 즐겼다. 이날 그는 본인의 사회관계망서비스 ‘트루스소셜’에 “내가 옳았다는 게 증명됐다. 그(바이든)의 사과를 기다릴 것”이라고 썼다. 비아냥댄 것이다.

멕시코 대통령 “극우 단체 압력 탓… 이해해”

반응은 엇갈렸다. 바이든 행정부의 장벽 건설 중단에 호응했던 야생동물 보호단체는 별 효과도 없는 장벽이 동물의 서식만 힘들게 만들 것이라고 항의했다. 반면 이민 제한을 주장하는 우익 단체는 환영했다. 댄 스타인 미국이민개혁연맹(FAIR) 회장은 “바이든 대통령이 실수를 인정했다”고 말했다. 안드레스 마누엘 로페스 오브라도르 멕시코 대통령은 기자회견에서 “미국 극우 단체의 강한 압력이 있다는 사정을 이해한다”고 했다.

입장 선회는 장벽 문제에 그치지 않았다. 이날 바이든 행정부는 인권 등 인도적 이유로 지금껏 자제해 온 베네수엘라 불법 이민자 추방도 재개한다고 발표했다. 미국 CBS방송은 지난달에만 베네수엘라인 약 5만 명이 미국·멕시코 국경을 불법으로 넘었다며 “역대 최고 수준“이라고 전했다.

워싱턴= 권경성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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