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싸게 주쿠메 하영들 사갑써(싸게 줄 테니 많이 사세요).”
지난 2일 제주 제주시 도두1동 제주시민속오일시장 내 할망(할머니의 제주어)장터에서 김악(92) 할머니가 좌판을 둘러보는 손님들에게 정겹게 말을 건넸다. 좌판에는 집 주변 텃밭에서 직접 재배한 호박잎과 호랑이콩, 양파, 제주바다에서 잡은 깅이(방게의 제주어)와 콩으로 만든 깅이콩지(콩게장) 등이 진열돼 있었다. 다른 곳도 보고 오겠다는 손님의 말에 김 할머니는 굳이 사지 않아도 괜찮다는 듯 “경헙써(그렇게 하세요)”라고 답했다. 김 할머니는 “돈 벌려고 새벽부터 (시장에) 온 게 아니다. 집에 있으면 시간이 가지 않는다. 여기 와서 지나가는 사람들 구경하다 보면 세월 가는 줄 모른다”고 웃으며 말했다.
제주시오일시장의 명물인 ‘할망장터’에서는 65세 이상 할머니들만 장사를 할 수 있다. 시장을 관리하는 제주시가 할머니들이 편하게 장사할 수 있도록 임대료를 받지 않고 입구 쪽에 무료 공간을 제공한다. 할망장터에 있는 120여 개의 좌판에는 할머니들이 직접 기른 나물이나 각종 농산물이 올라와 있다. 대부분 할머니들은 주변 상인들과 말벗을 하기 위해 소일거리 삼아 새벽부터 장터로 5일에 한 번씩 ‘출근’을 한다.
제주시오일시장의 역사는 한참을 거슬러 올라간다. 조선 말 보부상의 상거래 장소로 이용되다 1905년 지금의 제주시 관덕정 앞 광장에 장이 섰다고 전해진다. 그 후 1930년 제주시 건입동 지역으로 이전했고 1950년 한국전쟁 땐 시장터를 피란민 막사로 내주기도 했다. 1960년대 이후에도 5번이나 더 ‘이사’를 다닌 끝에 1998년 11월 제주공항 10분 거리에 있는 현재 위치에 자리를 잡았다. 이곳저곳을 떠돌 때도 상인들과 도민들의 발길은 끊이지 않았다. 어릴 적 부모의 손을 잡고 시장을 찾았던 이들이 지금은 장성해 자녀들을 데리고 방문한다. 도민 대부분이 이 시장에 대한 추억이나 사연들을 하나쯤은 갖고 있을 정도다. 상인들 중에서도 수십 년 장터를 지키거나 대를 이어 장사하는 경우가 많다. 이렇듯 제주시오일시장은 제주 사람들의 삶과 애환이 담긴, 떼려야 뗄 수 없는 공간이 됐다.
휴일을 맞아 가족들과 함께 시장에 온 김성수(48)씨는 “어릴 때부터 늘 찾던 곳이라 추억도 많고 정겹고 반갑다”며 “필요한 물건을 사러 오기보다 맛있는 것도 먹고, 사고 싶은 게 보이면 산다”고 했다. 구매 목적이라기보다는 놀러 오는 기분으로 방문한다는 얘기다. 그는 “시간이 흘러도 많이 변하지 않아 더 좋다”고 미소 지었다.
제주시오일시장은 매월 끝자리가 ‘2’와 ‘7’로 끝나는 날, 한 달이면 6번 장이 열린다. 제주도민은 물론 국내외 관광객까지 하루 평균 5만 명이 방문하는 국내 전통시장 가운데 최대 규모를 자랑한다. 농산물전, 수산물전, 잡화류전, 화훼전, 청과류전, 장터식당, 대장간, 가축전 등 1,000여 개의 점포가 들어서 있는데 “없는 것 빼고는 다 있다”는 말이 틀리지 않다. 다양한 제품들을 저렴한 가격에 구입하는 건 물론 흥정만 잘하면 에누리에 덤으로 상인들의 따뜻한 정까지 얹어 가져갈 수 있다.
주요 판매 품목으로는 제주에서 재배하는 청정 농산물을 비롯해 각종 수산물과 건어물, 제주갈옷, 감귤 등 특산물과 제주에서 자생하는 각종 약초와 지네ㆍ굼벵이 등 진귀한 약재가 있다. 체육복과 속옷, 침구, 신발, 장난감 등 각종 공산품뿐 아니라 이제 쉽게 찾아볼 수 없는 대장간에서 각종 농기구를 직접 제작 판매한다. 비록 예전보다 규모는 많이 줄었지만 가축전에서는 토종닭을 비롯해 아이들에게 인기 만점인 귀여운 토끼가 시선을 사로잡는다. 먹을거리도 빼놓을 수 없다. 시장 내 식당에서는 출출한 배를 채워주는 제주식 순대와 국수, 국밥, 다양한 안줏거리를 맛볼 수 있다. 제주 빙떡과 떡볶이, 풀빵, 호떡, 뻥튀기 등 주전부리도 즐비하다.
제주시오일시장에서 구매한 제품들은 전국 어느 곳이나 택배로 배달 가능하다. 쇼핑카트와 유모차 등도 대여할 수 있다. 차량을 이용하는 고객이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도록 대규모 무료주차장 시설도 갖췄다.
박근형 제주시오일시장상인회장은 “최근 경기 침체로 시장을 찾는 도민과 관광객이 줄면서 점포들마다 어려움을 겪고 있지만, 전통시장에서만 느낄 수 있는 따뜻한 정을 잊지 않고 다시 찾아주는 고객들이 있어 힘이 난다”며 “앞으로도 고객들이 더 편안하고 즐겁게 시장을 이용할 수 있도록 최선의 준비를 다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