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회전 우회전 72굽이… 티베트로 가는 오체투지 '하늘길'

입력
2023.10.07 10:00
<125> 차마고도 ⑤ 쭤궁에서 란우까지

디니(내털리 우드)는 세월이 흐른 후 첫사랑 버드(워런 비티)의 목장을 찾는다. 여전히 사랑하지만 이루지 못하는 마음을 담아 워즈워스의 시를 읊조린다. “다시는 돌아올 수 없다 해도, 초원의 빛이여, 꽃의 영광이여. 우리는 슬퍼하지 않으리, 남아있는 날에서 힘을 찾으리라.” 이곳에 올 때마다 영화 ‘초원의 빛’이 떠오른다. 초원에는 색다른 낭만 유전자가 있는지도 모른다. 차마고도 흔적이 깃든 티베트 초원은 ‘빛나는 영광’과는 조금 다르다. 방다초원(邦達草原)이 눈앞에 펼쳐지기 시작한다.


푸른 감성 '뽀글뽀글', 방다초원

쭤궁(左貢)을 출발해 방다로 간다. 차창 밖 공기가 냉장고에서 막 꺼낸 생수 맛이다. 해발 4,200m이고 한여름 아침을 달리는 덕분이다. 시리도록 푸른 감성이 뽀글뽀글 터진다. 하늘과 초원이 천생연분처럼 잘 어울린 때문이다. 화물차가 달려오고 뭉게구름이 꼬리를 물고 뒤따라온다. 구름이 땅바닥에 주저앉은 듯하다. 멀리서 소독차가 달려오는 착각이 든다. 무공해 천연 소독약이니 얼마든지 마셔도 좋다.

옥곡(玉曲)이 길을 졸졸 따라온다. 방다초원은 80km나 이어지고 너비도 20km다. 440km를 흐르는 강은 초원에 생명을 공급하는 자양분이다. 북쪽 창두(昌都)부터 남쪽으로 흐르다 매리설산에 가로막혀 우회한다. 삼강병류의 가장 왼쪽에서 흐르는 노강으로 합류한다. 설산이 아니라면 바다까지 돌파할 수 있었다. 사강병류(四江並流)가 될 뻔했다. 하늘과 구름, 풀 옆에서 물은 은은할 뿐 강렬하지 않다. 이 모두를 담은 초원이 빛을 뿜으며 점점 다가오고 있다.

방다 초입에서 초원의 여유를 즐긴다. 나지막한 산이 감싸고 있어 광활한 모습은 아니다. 방다는 ‘물결치는 두메 산골의 끝자락’이란 뜻이다. 종교 파벌 경쟁이 심하던 시기에 여러 사찰이 집단(帮)으로 겔룩빠로 개종하고 모여들었다. 원래 방다(帮達)였는데 1999년 한 글자를 바꿔 방다(邦達)로 개명했다. 종교의 역사를 빼고 물결과 산골이 어우러진 이름이 됐다. 티베트 말로 이해해야 한다.

오체투지로 힘겨운 수행을 하는 모습과 만난다. 티베트 사람은 평생 한 번 라싸에 위치한 조캉사원을 찾는 꿈을 꾼다. 차마고도에서 가끔 만나게 된다. 라싸까지 거의 1,000km 거리다. 서울과 부산을 왕복하고도 한참 더 가야하는 길이다. 라싸에서는 석가모니 12세 불상에 예불한다. 다시 서쪽으로 1,200km 떨어진 성산(聖山)까지 순례의 길을 떠난다. 본성을 참회하는 수행이다. 영화 한 편이 떠오른다.

6세대 감독으로 유명한 장양이 2017년 영화 ‘강린뽀체(གངས་རིན་པོ་ཆེ་·岡仁波齊)’를 선보였다. 티베트 성산인 카일라스(Kailash)가 제목이다. 망캉(芒康)의 한 마을에서 촌민 하나가 아버지 생전의 꿈을 이루려고 순례를 다짐한다. 임산부와 장애아동 등이 합류해 모두 11명이 출발한다. 라싸를 거쳐 성산에 이르는 2,400km의 순례 과정을 따라간다. 인간의 본성을 자극하는 우여곡절이 설산을 넘고 협곡을 건넌다. 차마고도 노정이 자주 보이고 쉽게 눈물이 주르륵 흐른다. 국내에서도 ‘영혼의 순례길’이란 제목으로 개봉했다.

날씨가 맑아서인지 방다에 들어서니 포근한 느낌이다. 가게가 단층으로 다닥다닥 붙었다. 차마고도의 마을답게 광장에 말을 끄는 사람이 조각돼 있다. 고산을 넘고 협곡을 건넌 ‘일심동체’를 보여준다. 초원의 기운을 받아 회복하고 다시 떠날 준비를 했으리라. 영화에 나오지 않는 시의 뒷부분이 있다. 시인은 ‘원초적인 공감, 고통에 대한 위로, 죽음을 헤아리는 믿음, 사색의 정신을 잉태하는 세월’이라 잇는다. 마치 차마고도의 초원을 노래하는 듯한 시어가 가슴 깊이 맺힌다.

72... 99... 108, 차마고도에서 가장 아름다운 고갯길


방다를 출발해 10분도 지나지 않아 차가 멈춘다. 능선을 지나는 지그재그 길인데 오도 가도 못하고 있다. 정체가 심해도 짜증은 없다. 싱그러운 초원을 만끽할 시간이 그만큼 늘어난다. 차문을 열고 바깥으로 나온다. 토담집과 돌담 사이에 야크 분변이 쌓여 있다. 집마다 한 무더기다. 초식동물 야크의 배설물은 생필품이다. 최상급 유기비료이고 겨우내 연료다. 담벼락에 붙이면 보온과 습기 제거에 도움을 준다. 냄새도 없어 식기를 닦는 데도 활용된다. 사방에 싸지르면 자연 건조되니 한가득 주워 쌓으면 든든하다.



조금씩 움직이는데 쉽게 길이 열리지 않는다. 말이 풀을 뜯고 있다. 몸매도 좋고 참 매끈하다. 안장을 걸치고 초원을 질주하고 싶다. 갈색, 흑색, 회색 털을 지니고 있다. 초원을 거니는 말의 미모를 자꾸 바라보게 된다. 갑자기 사람들이 차에 올라탄다. 도대체 길이 왜 막혔는지 알 길이 없다. 어설픈 운전자가 민폐를 끼친 듯하다. 능선을 넘어 전망대에서 초원을 바라본다. 언제 그랬냐는 듯 길에는 개미조차 보이지 않는다. 구름이 그림자로 초원을 누르고 도랑이 구석구석 돌고 있다.


4,658m 예라산(業拉山) 고개다. 엄청나게 거센 바람이 산을 넘는다. 타르초 소리가 귀청을 때리며 휘날리고 있다. 몇 글자 겨우 아는 까막눈인데 낯설지 않다. 지금껏 보고 왔으니 오색 찬란한 천 조각에 친숙해진 모양이다. 순결한 영혼을 담은 암호 같은 이미지다. 중생에게 기원이고 희망이다. 마방의 안전을 보장하는 벗이다. 양쪽으로 전망대가 있어 지난 길도, 갈 길도 보인다. 이제 바쑤(八宿)를 향해 떠난다. 고산을 짓누르고 있는 구름이 범접하기 힘든 길이라 속삭이고 있다.

우회전과 좌회전을 몇 번 하고 멈춘다. 20분도 지나지 않아 굳이 비좁은 공간에 정차한다. 차에서 내려 절벽 쪽으로 간다. 느닷없이 등장한 경이로운 경관에 경악이다. 이리 왔다 저리 갔다, 지그재그, 오르락내리락하는 길이 펼쳐진다. 능선을 통째로 이렇게 만들 수밖에 없던 이유가 있으리라. 길의 끝을 찾아 까마득하게 시선을 옮겨본다. 약 30km 거리에 고도 차이가 1,800m다. 도대체 이 길을 무어라 부를까? 뒤돌아보니 '천로72괴(天路72拐)'다.


괴(拐)는 회전이다. 그냥 ‘하늘로 오르는 72굽이’다. 차마고도에서 가장 아름다운 고갯길로 유명해 이름도 가지가지다. 근처의 강을 따서 ‘노강72굽이’라 한다. 정확한 숫자 대신 99나 108을 쓰기도 한다. 99는 영구히 가야 한다는 구구(久久)다. 108은 번뇌를 감내하라는 뜻이리라. 바닥에 주저앉아 ‘굽이’를 그리는 사람이 있다. 천로, 영원, 번뇌를 담겠지. 풍광과 만나는 예술이라면 그냥 자연은 아닐 터다.

길에 접어드니 뜻밖에 평탄하다. 마구 돌고 돌아가는데 자꾸 아래쪽을 보게 된다. 살짝 드러난 길에 차가 달리고 능선에 실핏줄 같은 옛길이 보인다. 마방의 길이다. 그 옛날 험로를 보노라니 문명의 도로는 허탈인지, 감사인지 모르겠다. 2010년 아스팔트 길이 완성됐다. 부드럽게 굽이굽이 내려간다. 올라오는 차는 힘들어 보인다. 언제 다시 올지 모르니 1km라도 걷고 싶다. 아무리 봐도 도보로 오르내린 흔적이 없다. 30분가량 하산하며 쉼 없이 회전한다. 가마촌(嘎瑪村)을 지나 도랑이 나오니 끝!

붉고 희고 검은 산 지나 데칼코마니 호수


그냥 도랑이 아니다. 삼강병류의 주인공 노강이 흐른다. 능선에 어슴푸레하게 보이는 길을 아찔하게 지났다. 나무 하나 없는 산은 황토를 덧칠하고 있어 황량해 보인다. 어디서부터 강물인지 모르게 산과 한 몸 같이 누렇다. 강물은 보기보다 빠르게 달린다. 티베트와 윈난을 지나 미얀마로 진입해 살윈(Salween)강으로 이름을 바꿔 벵골만으로 사라진다. 서진하는 차마고도 국도에서 노강과 만나는 구간은 10km 남짓으로 매우 짧다.

강을 따라가니 노강대교가 나타난다. 차마고도에서 대형 차량이 지나갈 수 있는 유일한 교량이다. 교통의 주요 거점이고 군사 지역으로 분류해 철저히 관리한다. 다리 위에 멈출 수 없고 촬영도 금지돼 있다. 다리를 세울 때 노강협곡이 가로막고 있어 10여 명의 사병이 사망할 정도로 난공사였다. 다리는 터널과 연결돼 있다. 쓰촨에서 라싸로 가는 길의 목구멍(咽喉)이라며 애지중지한다.

노강이 사라졌으나 샛강은 졸졸 흐른다. 강변 마을 와다촌(瓦達村)을 지나니 산세가 완만해진다. 갑자기 산과 강이 붉어지기 시작한다. 이제는 별로 신기하지 않다. 변화무쌍한 자연이라 해도 더 이상 새로운 색감으로 탄성을 자아내지는 못한다. 그래도 붉고 희고 검은 산이 차례로 등장하니 유심히 관찰한다. 주변에 동, 철, 아연 매장이 많다는데 관련이 있을지 모르겠다. 길은 여전히 예측 불허다.

‘산기슭 아래 마을’이란 뜻의 바쑤(八宿)에 들어선다. 차마고도에서 망캉, 쭤궁과 함께 현(縣) 단위다. 4개 진(鎮)과 10개 향(鄉), 126개 촌(村)을 관장한다. 7~9세기 토번 왕국이 직접 관할하던 지역이다. 원나라 이후 여러 왕조는 통치를 위해 관청을 설치했다. 오래된 도시다. 경기도보다 넓은 1만2,500㎢인데 인구는 4만3,000명이다. 티베트와 어울리는 인구 밀도다.


바쑤를 출발해 20여분 달린 후 남쪽으로 방향을 잡는다. 고산이 겹겹이 가로막고 있어 우회하고 있다. 어쩔 수 없이 고개를 하나 넘는다. 해발 4,475m의 안주라산(安久拉山) 고개다. 1996년 부근에서 눈사태가 발생해 57명이 목숨을 잃은 사고가 났다. 그래서인지 도로에 구조물이 많이 설치돼 있다. 바쑤 남쪽 90km 떨어진 란우(然烏)가 가까워진다. 온통 구름에 휩싸인 하늘에 산봉우리 둘이 살짝 모습을 드러낸다. 높이가 얼마나 차이 나길래 한 봉우리에는 녹지 않은 눈이 눈곱만큼 남았다. 서로 얼마나 떨어져 있길래 하나는 깔끔하다.

3,750m에 위치한 란우에 호수가 있다. 11월부터 이듬해 5월까지 결빙하는 담수호다. 반년이나 얼음이 어는 까닭은 추위 때문이기도 하지만 언색호라 그렇다. 산이 붕괴해 쏟아진 토사에 막혀 흘러가지 않는 호수다. 구름이 산봉우리와 능선을 완전히 감추고 있다. 정지한 상태는 아니라 황토를 품은 산자락이 살짝 보였다 사라진다. 거울 같은 호수에 반영된 하늘과 구름이 매력이 넘친다. 미동이 없어 하늘과 능선이 데칼코마니다.

호수는 29km나 이어진다. 겨우내 꽁꽁 움츠렸던 설산은 봄이 되면 몸을 풀어 수분을 공급한다. 호수 부근에 자란 야생의 꽃과 풀은 모두 야크 차지다. 서두를 필요가 없으니 정지된 화면이다. 차마고도 행렬이 물을 얻고 다시 길을 떠나는 상상을 한다. 그 옛날 마방처럼 설산과 호수의 기운을 가득 채우고 충전의 시간을 만끽한다. 초원과 고산, 협곡을 거쳐 쉼 없이 달렸더니 호수와의 조우가 유난히 행복하다.

최종명 중국문화여행 작가 pine@youyu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