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촌 추석인데 잘 지냈어?" "난 잠만 자다 왔지 뭐. 밥 먹으러 왔어요."
지난달 29일 서울 종로구 창신동에 있는 음식점 '옛촌'에는 문을 연 지 한 시간 만에 손님이 꽉 들어찼다. 추석 당일에 문전성시라니 의아할 법도 했다. 하지만 "사장님 나 왔어"라며 손님은 자연스레 가게로 들어섰고, 사장 박성순(56)씨 역시 "삼촌 왔느냐"며 익숙한 듯 방문객에게 '맞춤형 메뉴'를 제공했다.
주인이 손님 이름과 식성까지 외우고 있는 이곳은 서울시가 지원하는 '동행식당'이다. 지난해 8월부터 시는 쪽방촌 주민에게 하루 한 끼 8,000원 상당의 식권을 제공하고 있다. 주민들은 식당을 찾아 식사하거나 전화로 제육볶음, 동태탕 같은 '동행메뉴'를 배달시킬 수 있다. 서울 지역 쪽방촌 근처 40여 개 음식점이 참여하는데, 창신동엔 7곳이나 있다.
엿새간 이어진 황금연휴에도 옛촌은 어김없이 문을 열었다. 또 다른 창신동 동행식당 '창신숯불갈비'도 마찬가지였다. 업주들은 "연휴엔 더더욱 운영해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창신숯불갈비 사장 김영민(65)씨는 "우리 가게가 쉬면 (쪽방촌 주민들이) 사비로 밥을 사 먹어야 하는 데다, 문을 연 음식점도 많지 않다"며 "이웃사촌 같은 분들이 한 끼라도 맘 놓고 드셨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사실 일반 손님이 드물어 연휴 기간엔 인건비 등 운영할수록 손해가 적지 않다. 그래도 사장 박씨는 "저희는 가게 마감하고 집에 가서 친척들이랑 회포 풀면 된다"며 대수롭지 않게 웃어넘겼다.
따뜻한 밥 한 끼도 고마운데, 식당에선 쓸쓸히 홀로 명절을 보낼 쪽방촌 식구들을 위해 추석 음식을 준비했다. 창신숯불갈비 측은 육전과 잡채를 만들었고, 옛촌에선 추석 선물로 계란 10개씩을 나눴다. 이날 옛촌에서 식사한 쪽방촌 주민 이길해(79)씨는 "식당 덕에 명절 외로움을 어느 정도 달랬다"며 "식권을 내밀어도 늘 반갑게 맞아줘 감사할 따름"이라고 말했다. 주민 한영민(60)씨도 "하루 한 끼라도 제대로 챙겨 먹으니 몸이 많이 좋아졌다"고 했다.
운영한 지 1년이 지나면서 동행식당은 쪽방촌 주민의 고독사를 방지하는 '민간 네트워크'로도 자리 잡았다. 정부가 아무리 촘촘한 고독사 방지책을 내놔도 제도 자체에는 허점이 생길 수밖에 없다. 쪽방 주민들과 동행식당 종사자들의 끈끈한 관계는 이런 빈틈을 메우는 소통 창구다.
김씨는 올여름 배달을 갔다가 단골손님이 집 앞에서 잠든 걸 발견했다. 거동이 불편한 몸으로 집 열쇠를 잃어버리자 어찌하지 못하고 그대로 잠든 것이다. 김씨는 집주인에게 대신 연락해 열쇠를 복사했고, 단골은 그에게 여분 열쇠를 맡겼다. 김씨는 "요즘도 전화를 안 받으면 수시로 찾아간다"며 웃었다. 박씨도 얼마 전 한밤중에 "숨이 안 쉬어진다"는 단골의 전화를 받고 구급차를 불러 병원에 보낸 적이 있다.
봉사 차원만은 아니다. 고정 손님 수십 명이 생겨 동행식당 사업은 음식점 운영에도 도움이 된다. 물론 손님과 매일 주고받는, 값으로 환산할 수 없는 정(情)에 비할 바는 아니다. 창신숯불갈비 사장 고영심(58)씨는 "본인 생일에 받은 케이크를 주겠다고 가져온 분도 있다. 식당 하는 맛이 나는 이유"라고 설명했다. 박씨도 "제가 하나 잘해드리면 열을 받는 것 같다"며 "물가가 올라 어려워도 동행식당은 계속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