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제주 올레길부터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자의 길까지 걷기가 인기다. 걷기는 직립보행의 인류가 만든 기본적이면서 효율적인 이동 수단이자 활동의 표현이다. 특히 자연 속 생활에서 도시의 삶으로 바뀐 현대 사회는 다양한 분야에서의 공유 개념과 함께 도시 공간의 공공성 확보가 요청되며 최근 이에 관한 사회적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지금까지의 도시는 걷기보다 자동차나 지하철 등 편리하고 효율적인 교통수단을 우선시하고 선호했다면 이제는 우리가 원래 뚜벅이였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도심 속을 직접 걸으면서 도시와 현대건축을 즐겨보자.
걷기는 적당한 속도를 가진 걸음으로 우리의 가장 기초적인 교통수단이며 생활 활동의 장으로서 의미가 있다. 우리는 평소 잘 인식하지 못하지만, 도시의 대표적인 공공공간은 길로 대표되는 걷기를 위한 보행공간이다. 이 공간은 주로 건축물 자체보다는 건축물 사이나 도시의 빈 공간인 가로, 광장, 그리고 공원 등이다. 보행공간을 구성하는 보행환경은 보도, 차도, 건물 등 가로 주변 환경뿐만 아니라, 도시 내의 형태 특성이나 가로의 연결 등을 모두 포함한다. 즉 걷기에 직접 영향을 미치는 신체적, 정신적 측면과 이에 관련된 모든 물리적 환경과 감각적 분위기 등까지 확장한 전체적인 환경을 의미한다. 보행공간은 도시 속 생활의 질을 높이는 데 기본적인 환경을 제공하기 때문에 개인적인 폐쇄공간보다는 불특정 다수에게 개방해야 하며, 당연히 항상 열린 공간이어야 한다. 사람들은 이러한 보행공간을 통하여 사회 속 타인과 연결되고 도시 속에 머물게 되며 머무름은 도시 공간의 활성화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덴마크의 건축가이자 도시 설계 전문가인 얀 겔은 보행공간에서 발생하는 사람들의 활동을 필수적 활동, 선택적 활동, 사회적 활동으로 구분하고, 사람들의 다양한 활동 간의 상관관계와 사회적 이익을 연구하였다. 연구 결과에 따르면, 필수적인 활동보다는 선택적 활동과 사회적 활동이 많이 발생하는 보행공간일수록 사회적 이익이 많은 공간이며 선택적 활동과 사회적 활동은 건축물과 같은 물리적인 환경의 영향을 크게 받는다고 한다. 보행은 이동 자체가 목적인 목적보행과 움직이면서 머무름을 제공하는 여가보행으로 나눌 수 있다. 필수적 활동은 목적보행을 수반하며 선택적 활동과 사회적 활동은 여가보행과 더 관련이 깊은데, 목적 없이 걸으면서 도시와 그 안에서 사람과의 관계를 맺는 것이 바로 진정한 걷기라 할 수 있다.
집을 떠나 여행을 가면 기본적으로 걷게 된다. 미지의 세계를 아는 제일 좋은 방법은 걸으면서 직접 경험하는 것이다. 싱가포르, 홍콩, 도쿄, 뉴욕 등 세계적인 도시에는 그 명성에 걸맞은 대표 보행로가 있고, 보행로가 특정 도시를 상징하는 랜드마크가 되고 있다. 도시마다 보행로도 다 다르고 그것만의 특색이 있다.
머라이언이 도시의 상징인 싱가포르의 새로운 랜드마크인 마리나 베이 샌즈는 그 자체로도 유명하지만 해가 지면서 건너편 가든스 바이 더 베이의 인공 구조물과 조명을 이용한 슈퍼트리 쇼는 거대하고 다채로우며 초현실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많은 사람은 돗자리, 신문지를 이용하거나 심지어 공원 바닥에 그대로 누워서 이 시간을 즐긴다. 또 다른 사람은 슈퍼트리 사이에 놓인 공중 보행로를 걸으면서 조금 더 가까이에서 색다른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마치 하늘에서 주변의 환상적인 빛과 색의 향연 속으로 빠져드는 듯한 경험은 이곳만의 자랑거리이다. 싱가포르와 비슷하지만 다른 도시 홍콩에는 조금 덜 걸으면서 도시 풍경을 경험할 수 있는 곳이 있다. 미드레벨 에스컬레이터는 세계에서 가장 긴 옥외 에스컬레이터로 미드레벨의 교통 상황을 개선하기 위해 건설했다. 힐사이드 에스컬레이터라고도 부르는 총 800m 길이의 에스컬레이터는 중완(中环) 센트럴 마켓에서 시작하여 고지대의 주택가 반산구(半山区)까지 이어지고, 빅토리아 피크 중턱까지 올라갈 수 있다. 왠지 아련한 옛사랑의 감정이 떠오르는 미드레벨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길을 오르면 눈에 들어오는 낡은 아파트와 빌딩, 오밀조밀 가득히 모여 있는 소호의 상점과 노점상 등 서민의 냄새가 물씬 나는 홍콩만의 도시 풍경을 제대로 느낄 수 있다.
도쿄 도시 풍경의 상징인 시부야역 북서쪽 대각선 횡단보도인 시부야 스크램블 교차점은 교차로 전 방향으로 한 번에 1,000명 이상이 도로를 건너는 장관을 연출한다. 시부야역에서 스크램블 타워 쪽으로 가는 도중 좁은 골목 틈 사이로 나타나는 미야시타 파크는 주변 번화가와 또 다른 도심의 풍경을 만든다. 이곳은 1930년대 지상공원으로 조성되어 오랜 세월 자리를 지키고 있는데, 최근 노후화되고 방치되었던 미야시타 공원을 재개발하여 저층형 복합문화상업공간으로 탈바꿈했다. 지상 1~3층은 호텔, 상업시설, 시부야 요코초(寿横丁) 등으로 이루어진 복합 건물이고, 기존의 공원은 옥상에 위치한다. 옥상 공원에는 산책뿐만 아니라 스케이트장, 볼더링 월, 샌드 코트 등 도심의 일상에서 하기 어려운 운동 시설을 갖추고 있다. 도심 속 공원이지만 330m의 선형공원으로 주변과 연결되어 있어 고층 건물로 가득한 복잡한 도심을 아무런 방해 없이 걸을 수 있다. 상업시설과 공원이 만나 다양한 콘텐츠로 가득한 도쿄 최고의 번화가를 공중 보행로가 관통하고 시민들은 그 길을 걸으며 산책한다. 이와 비슷한 도심부 재생사업의 대표적 사례인 뉴욕의 하이라인 파크는 뉴욕 맨해튼 남쪽의 12번가에서 30번가까지 확장되어 첼시 지구를 거쳐 로어 웨스트사이드에서 운행되었던 고가 화물 노선을 선형공중공원으로 재이용한 장소이다.
서울의 상황은 어떨까? 서울의 구도심은 다양한 역사적, 문화적 공간이 있는 역동적인 곳이다. 그러나 도시의 급격한 확장에 따라 외곽의 주거와 도심지 직장 사이의 이동이 일반화되어 주중의 낮에는 직장인들로 인하여 활성화되지만, 밤에는 도심이 비워지고 주말에는 특정한 장소에만 몰린다. 이러한 서울에 최근 몇 년 사이 도시를 대표하는 보행로가 들어섰다. 청계천로와 서울로7017이다.
청계천로는 기존의 도심부를 동서방향으로 가로지르는 청계고가도로를 철거하고 청계천을 복원한 것이다. 서울 도심부의 유일한 수공간인 청계천로는 여러 단계의 높이차로 인한 입체적 보행, 분수와 돌다리의 천변, 보행거리의 다양한 바닥 패턴, 조경, 조형물, 천변 벽화, 지상공간을 연결하는 다양한 다리들, 주변 건물들과의 공간 관계를 형성하는 필로티나 테라스 공간, 건물 옥상의 전망대 등 다양한 공간 특성이 있어 보행자의 연속적 공간 경험과 문화 체험 등 머물기도 하고 산책할 수도 있다.
또한 서울로7017은 퇴계로의 회현역부터 만리동까지 기존 차량용 서울역 고가도로를 보행 전용의 선형 가로공원으로 재활용한 결과이다. 서울로7017은 도시기반시설을 머무르고 즐길 수 있는 공간으로 전환하려는 시도인데 고가 가로라는 특성상 주변과 다양하게 연결하기 어려운 한계에도 불구하고 여가보행과 함께 주변 사용자들의 목적보행 역할을 한다. 세계적인 건축가 그룹 MVRDV가 설계했지만, 조경 중심의 단조로움과 편의 시설 및 다양한 콘텐츠의 부족 등 도심부 보행공간의 역할이 적어 아쉽다. 여가보행의 가로체계는 쉬운 접근성과 상대적으로 머무를 수 있는 공간구조와 함께 여러 가지 즐길거리가 필요하다. 결국, 성공하려면 하드웨어뿐만 아니라 소프트웨어도 같이 개발되어야 한다.
서울을 대표하는 도시 풍경은 남산 또는 한강과 같은 자연경관이 손꼽히며 도심부에서는 청계천이 높은 인지도를 가진다. 서울의 구도심은 역사적 변화에 따라 발전해서 경복궁과 광화문광장을 중심으로 대표적인 중심가로인 종로, 근대역사의 중심인 시청과 을지로, 산업발전의 대표적 상징이었던 고가도로를 재개발하여 자연친화성과 지속가능성의 상징이 된 청계천로와 서울로7017, 그리고 현대건축과 현대 도시 활동의 상징성인 동대문 디자인 플라자(DDP) 등 다양한 시대의 산물이 유물처럼 산재해 있다. 행위자-연결망 이론에 따르면, 행위자로서 도시 속 보행자뿐만 아니라 도시경관과 함께 이들을 연결하는 네트워크의 관계성을 통하여 도시 속 다양한 위상학적 공간을 창출할 수 있다. 점적인 요소인 도시경관에 보행의 선적인 특성을 연결하여 연속성을 부여하면 도시는 기존의 정적 활동에서 동적인 활동으로 전환하게 되어 도심 문화의 장이 형성되고 활성화할 것이다. 결국, 보행은 개인의 차원에서 시작하지만, 도시 공공성의 차원에서 중요한 요소가 된다. 이쯤에서 되묻는다. 우리는 왜 걷는가? 사람마다 이유는 다 다르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다. 우리는 서울을 걷고 싶다. 걸어서 서울 속 깊이 들어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