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불 피해 아픔 딛고 날았다...늠름한 12세 ‘산골 꼬마 보더' 문강호

입력
2023.09.28 07:00
22면
초등학교 6학년 스케이트보드 국가대표
지난 4월 강릉 산불에 집 전소 
아끼던 장비도 모두 불타 
임시 보호시설서도 맹훈련
큰 시련에도 값진 결선 진출

강원 산골 출신의 ‘꼬마 보더’가 산불 피해로 집을 잃은 아픔을 딛고 아시아 최고의 무대에서 힘차게 날아올랐다.

2022 항저우 아시안게임에 출전한 한국 선수단 가운데 남자 최연소이자, 초등학생 스케이트보드 국가대표인 문강호(12·강릉 율곡초)는 처음 출전한 아시안게임에서 수준급 실력을 뽐냈다. 나이가 어리고, 체구도 작지만 두려움 없이 선보인 대담하고도 화려한 기술은 대회장 하늘을 수놓았다. 상위 8명이 겨루는 25일 결선에서 8위에 자리했지만 스케이트보드 불모지 그리고 초등학교 6학년이 결선을 통과한 자체만으로 엄청난 성과다.

무엇보다 어린 나이에 큰 시련을 이겨냈다는 점이 큰 울림을 준다. 27일 한국일보 취재 결과, 문강호의 가족은 지난 4월 강릉 산불 피해로 삶의 터전을 잃었다. 살던 집이 모두 전소됐고, 문강호가 아꼈던 보드 관련 물품도 모조리 다 불에 탔다. 당시 문강호는 외부 소집 훈련 일정으로 산불 피해 전날 집을 나가 있어 최악의 상황은 피했지만 훈련을 마치고 돌아와서 잃어버린 터전을 보고는 착잡한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이날 항저우에서 연락이 닿은 문강호는 “갑자기 난생처음으로 불이 났다고 하니까 당황스럽고 무섭기도 했다”며 “가족들 걱정이 컸는데, 다행히 다친 사람이 없다는 얘기를 듣고 안심했다”고 돌아봤다. 그러면서 “이사 간 지 1년도 안 된 집이 불에 타니까 슬펐다”며 “집 안에 보드 장비를 쌓아놓은 방이 있는데 아끼던 물건도 다 탔다”고 크게 아쉬워했다.

아픔을 겪었지만 문강호의 열정은 꺾이지 않았다. 임시 보호시설에 지내면서도 꿈의 무대 도전을 위해 당차게 보드를 타고, 실력을 갈고닦았다. 23일 대회 개회식 때는 3x3 농구 국가대표 이원석의 목말을 타고 해맑은 모습으로 입장해 큰 주목을 받기도 했다. 문강호의 아버지 문기주씨는 “워낙 성격이 낙천적”이라면서 “본인이 성장하고 싶은 욕심도 많아 어떤 상황에도 흔들리지 않고 보드를 탔다”고 설명했다.

문강호가 태극마크를 다는 과정도 드라마틱하다. 그의 가족은 강릉 주문진의 산골에 터를 잡고 지냈는데, 스케이트보드를 좋아하는 아들을 위해 부모님이 직접 팔을 걷어붙였다. 총 5개월이 걸려 집 마당에 ‘산골 파크’를 지은 것이다. 문기주씨는 “강호가 9세 때 처음 보드를 탔는데 재주가 있었다”며 “그런데 불모지, 더구나 강릉에서 보드를 탈 방법이 없어 마당에 만들어줘야겠다고 생각했다”고 밝혔다.

산골 파크에서 좋아하던 보드를 마음껏 탄 문강호의 실력을 쑥쑥 늘었다. 2년 차에 처음 출전한 공식 대회에서 4위에 올랐고, 3년 차에 국가대표 선발전에서 2위로 태극마크를 달았다. 올해 4년 차엔 국제스포츠 종합대회까지 밟았다. 문강호는 “아빠가 산속에 살 때 만들어준 게 스케이드보드 실력을 키우는 데 정말 큰 도움이 됐다”며 “너무 감사한 마음”이라고 고마워했다. 이후 문강호의 가족은 산속 생활을 정리하고 지난해 강릉 시내로 이사 갔다.

이번 대회에서 쏟아지는 큰 관심에 문강호는 기뻐하면서도 비인지 종목인 스케이트보드가 더욱 활성화되기를 바랐다. 그는 “이번에 갑자기 관심을 많이 받고 스케이트보드를 알릴 수 있어 좋긴 한데, 씁쓸한 부분도 있다”며 “평소에도 우리 종목을 알아봐줬으면 좋겠다”고 당부했다. 문기주씨도 “이런 스포트라이트도 며칠 지나면 사라질 거다. 꾸준한 관심과 투자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항저우 = 김지섭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