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미술 거장의 전시회가 잇따라 열리고 있다. 여유가 있는 추석 연휴는 국내에서 쉽게 접하지 못했던 이들의 예술세계를 찬찬히 살펴볼 수 있는 좋은 기회다. 이들은 작품에서 간단 명료한 표현기법을 주로 쓰지만 장르를 뛰어넘고 있으며 다양한 정서를 드러낸다는 공통점이 있다.
국토의 중심에 있어 귀성 귀경길에 들를 법한 대전. 동구 ‘헤레디움’에서는 국내 최초의 안젤름 키퍼(78) 개인전이 열리고 있다. 역사, 문화, 신화에서 소재를 차용해 다양한 장르를 넘나드는 키퍼는 이번 전시에서도 오스트리아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시로부터 영감을 얻은 작품을 선보였다.
시작에 대한 기대와 끝남에 대한 아쉬움이라는 ‘양가감정’을 선사하는 것이 이번 전시작의 가장 큰 특징이다. 황토색 벽돌을 쌓아 올린 설치작인 ‘지금 집이 없는 사람은 이제 집을 짓지 않습니다’는 폐허를 연출한 것으로 보이지만, 한편으로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듯도 하다. 건물을 쌓고 있는 중으로 해석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가을(Herbst)’과 같은 작품은 금박이나 모래, 밀짚, 나무 등의 소재를 활용했다. 회화에 머무르지 않고 입체적인 공간을 창출하고 있다. 작품의 정서도 쇠퇴와 재탄생으로, 상반되는 감정을 동시에 표현하고 있다. 전시는 내년 1월 31일까지.
서울 종로구 국제갤러리에서는 인도계 영국 유명작가 아니시 카푸어(69)의 개인전이 열리고 있다. 그는 스테인리스 강철이나 합성수지를 매끄러운 표면을 가진 오목하거나 볼록한 형태로 가공한 조각 작품으로 잘 알려진 작가다.
이번 전시에서는 정면에서 보면 검정 원형을 나타내지만, 측면에서 보면 제각각의 입체 모형을 드러내는 작품이 전시됐다. 빛을 99.9% 흡수하는 ‘반타 블랙’이란 신소재를 사용한 것이다.
카푸어전에서도 평면에 머무르지 않고 입체·공간감을 창출해내는 거장의 예술세계를 엿볼 수 있다. 인도 신화에 나오는 여신 ‘칼리’의 길게 늘어뜨린 혀에서 모티프를 얻은 ‘Tongue’ 등 회화와 조각, 추상과 구상을 넘나드는 작품이 상당수다. ‘In-between’에서도 그림에서 튀어나온 듯한 설치 표현으로 장르의 경계를 넘나든다. 10월 22일까지.
서울 강남구 글래드스톤 갤러리에서는 96세의 현대미술 거장 알렉스 카츠의 백합, 수선화, 카네이션 등 다양한 꽃 그림을 전시하고 있다. 유화지만 빠른 손놀림으로 섬세한 표현을 한 것이 돋보인다.
검정색 배경에 꽃과 잎을 확대해 그려 장식 요소를 배제한 특유의 표현이 패턴감과 세련미를 느끼게 한다. 꽃을 표현하며 2, 3개의 색만 사용한 미니멀 감성이 특징. 구상이지만 대상의 단순한 재현이 아니다. 대상물에서 작가가 느낀 찰나, 순간의 생명력을 표현하려 한 그림들로 보인다. 카츠는 꽃이 지닌 생생하고 아름다운 색채, 형태, 질감에 매료돼 1950년대부터 꾸준히 꽃을 그려왔다. 현대미술이 모두 추상으로 달려갈 때 묵묵히 구상회화의 길을 걸어온 그의 작품은 묘하게도 추상과 맞닿아 있다. 10월 21일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