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남아는 사기·범죄 온상?… 중국 영화에 골머리 앓는 ‘관광 천국’

입력
2023.09.26 09:30
동남아 배경 중국 영화 탓 우려 커져
유엔 "미얀마서만 12만 명 인신매매"

#1. 중국인 프로그래머가 한 남성으로부터 동남아시아 한 국가 내 고임금 일자리를 제안받는다. 큰돈을 벌 것이라는 기대도 잠시, 그는 곧 어두운 방에 감금돼 온라인 피싱 사기를 저지르도록 협박당한다. 취업 사기를 당한 것이다. 주인공은 살아남기 위해 범죄 활동에 가담한다.

#2. 한 중국인 부부가 결혼 1주년 축하를 위해 동남아시아의 섬으로 여행을 떠난다. 돌연 아내가 실종되고 살해된 채 발견된다. 현지 경찰은 범죄 증거가 부족하다며 수사 개시를 거부한다.

지난 6월과 8월에 각각 개봉한 중국 블록버스터 영화 ‘노 모어 베츠(No More Bets·중국명 孤注一掷)’와 서스펜스 스릴러 영화 ‘로스트 인 더 스타즈(消失的她)’의 내용 일부다. 이처럼 동남아시아를 ‘사기 온상’ 또는 ‘위험 국가’로 묘사한 영화가 중국에서 인기를 끄는 탓에 동남아 관광 산업이 타격을 받고 있다고 24일(현지시간) AFP통신과 싱가포르 스트레이트타임스가 보도했다.

‘동남아=위험지역’ 인식 팽배

두 매체 보도를 종합하면, 최근 중국인들 사이에서는 동남아 여행 기피 분위기가 확산되고 있다. 온라인과 오프라인 모두 마찬가지다. 예컨대 중국판 엑스(X·옛 트위터)인 웨이보에선 ‘동남아 여행이 안전한가’에 대한 논의가 연일 이어지고, 관련 게시물이 수백만 회 공유되고 있다. 웨이보가 진행한 설문에서 응답자 5만4,000명 중 89%(4만8,000여 명)는 “미얀마 여행을 하지 않을 것”이라고 답했다. 동남아 여행 의향을 묻는 또 다른 조사에서도 응답자의 85%가 “안전상 이유로 고려하지 않는다”고 답변한 것으로 나타났다.

중국과 가깝고 물가도 저렴한 동남아가 그간 중국인들의 대표 해외 관광지로 꼽혔던 걸 감안하면 이례적인 현상이다. 외신들은 올해 중국에서 흥행한 영화 두 편에서 이유를 찾는다. ‘로스트 인 더 스타즈’는 올여름 중국에서 최고 수익을 기록했다. 사이버범죄 문제를 다룬 ‘노 모어 베츠’는 개봉 한 달 만에 중국 박스오피스 1위에 올랐다.

두 영화 모두 동남아를 배경으로 삼았을 뿐, 특정 국가를 콕 집어 묘사하진 않았다. 그러나 관람객을 중심으로 ‘사이버 사기 범죄, 인신매매, 살인이 잦은 곳’이라는 인식이 팽배해지면서 “관광을 자제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덩달아 커졌다.

베이징의 대학생 리나 퀴안(22)은 AFP 인터뷰에서 “이야기에 과장이 있긴 하겠지만, 태국으로 여행을 갔다가 캄보디아나 미얀마 등으로 끌려갈 우려도 없지 않아 (관광을) 고민하고 있다”고 말했다. 보험회사 직원 린민지(26)는 “두 영화를 보고 동남아 경찰은 믿을 수 없다는 인상을 받았다”고 전했다.


동남아 “관광객 안전 보장하겠다”

터무니없는 우려는 아니다. 지난달 유엔 인권고등판무관실은 “수십만 명이 동남아 국가에 납치 또는 인신매매된 뒤 암호화폐 사기나 불법 도박 개장, 사이버 사기 등 온라인 범죄를 저지르도록 강요받았다”는 내용의 보고서를 발표했다. 지금까지 파악된 인원만 미얀마에서 최소 12만 명, 캄보디아에서 약 10만 명이다. 유엔은 라오스와 필리핀, 태국 등에서도 유사 사례가 수만 명씩 나오는 것으로 추정했다.

주미얀마 중국대사관은 지난해부터 중국 국민에게 “고액 연봉으로 유혹하는 온라인 채용 공고에 속지 말라”고 당부했다. 영화가 완벽한 허구가 아니라, 일정 부분 현실을 반영하고 있다는 걸 방증하는 대목이다. 불안감이 더욱 커졌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동남아 관광업계는 울상을 짓는다. 관광산업 의존도가 높은 동남아에서 중국 여행객은 ‘큰손’으로 꼽힌다. 2019년 캄보디아를 찾은 외국인 관광객 660만 명 중 230만 명(35%) 이상이 중국인이다. 같은 해 태국을 방문한 중국인도 1,100만 명으로 전체 관광객의 25%를 차지했다. 올해 중국이 코로나19로 금지했던 해외 단체여행을 재개하면서 ‘유커의 귀환’을 기대했는데, 예상 밖 변수로 막대한 타격을 입게 된 셈이다. 태국 매체 타이거는 “태국 내에선 관광객이 거리에서 납치되는 사건도, 인신매매와 사기단이 적발된 사례도 없다. 하지만 중국 영화가 관객들에게 공포감을 불러일으키며 결과적으로 관광산업에 그림자를 드리웠다”고 분석했다.

논란이 커지자 주중 태국 대사관은 “중국인 관광객 안전을 보장하겠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차이 시블린 캄보디아 여행사협회 회장은 “중국인들은 정부의 말을 잘 듣는 만큼, 중국 정부가 도와주길 바란다”고 호소하기도 했다.

하노이= 허경주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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