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전자에 부품 갑질을 한 혐의로 공정거래위원회로부터 과징금 191억 원을 부과받은 브로드컴 사건에는 '숨은 조연'이 있다. 바로 글로벌 반도체 시장에서 브로드컴의 오랜 라이벌인 퀄컴이다. 브로드컴 갑질 사건을 수면 위로 끌어올린 건 피해 기업 삼성전자가 아닌 퀄컴이었다. 2020년 6월 부품 갑질의 핵심인 '장기 계약(LTA)'이 불공정하다며 공정위에 신고한 쪽이 퀄컴이었던 것이다.
당초 삼성전자는 △RFFE(통신 주파수 향상 부품) △와이파이 △블루투스 △GNSS(위성항법시스템) 등 스마트기기 핵심 부품 공급 계약을 압도적 1위 사업자인 브로드컴과 맺고 있었다. 그러다 삼성전자가 브로드컴 의존도를 낮추기 위해 2018년부터 퀄컴, 코보 등과 새로운 부품 공급 계약을 체결하자 브로드컴이 들고 나온 게 LTA다.
퀄컴, 코보의 약진을 못마땅하게 여긴 브로드컴은 삼성전자에 매년 7억6,000만 달러어치의 부품을 사도록 하는 LTA를 강요했다. 애초 이를 거절했던 삼성전자는 브로드컴이 부품 주문을 받지 않거나 선적을 중단하는 등 압박에 나서자, 결국 2020년 3월 LTA를 수용했다.
퀄컴이 브로드컴의 LTA를 신고한 사유는 스마트기기 부품 시장 내 경쟁 제한이다. 브로드컴 외의 사업자가 스마트기기 부품 시장에 진입하기 어려워지면 그만큼 품질, 가격 경쟁도 사라진다고 판단했다. 퀄컴, 코보는 브로드컴의 독점력이 강해질수록 영업에 타격을 입는 상황이기도 했다.
브로드컴과의 오랜 악연이 신고 배경 중 하나라는 해석도 있다. 이번 사건과 반대로 브로드컴은 2006년 조건부 리베이트 지급 등을 이유로 퀄컴을 공정위에 신고한 적이 있다. 퀄컴이 자사 부품을 많이 구매하는 휴대폰 제조사에 그 대가로 돈을 지급했다는 혐의다. 공정위는 2009년 당시 기준 역대 최대인 과징금 2,600억 원을 퀄컴에 부과했다. 두 회사는 미국에서 2004년부터 5년 동안 특허 소송을 벌이며 다투기도 했다.
브로드컴이 '셀프 구제'를 의미하는 동의 의결 대신 과징금 제재를 받는 과정에서도 퀄컴이 등장한다. 공정위는 지난해 9월 브로드컴이 신청한 동의 의결 절차를 개시, 자진 시정안을 함께 마련했다. 자진 시정안을 공정위 전원회의가 받아들이면 브로드컴은 법 위반 딱지를 뗄 수 있었다. 삼성전자가 피해 보상 소송을 제기하더라도 브로드컴에 유리한 판단이다.
하지만 삼성전자가 '피해 보상책이 빠졌다'고 강력 반발하면서 전원회의는 6월 자진 시정안을 기각했고, 이후 제재 절차가 본격화했다. 이달 13일 브로드컴 제재 여부를 심의하는 전원회의에 퀄컴 측은 선임법무이사를 보내 "브로드컴을 충분히 제재하지 않으면 반경쟁 행위를 지속할 것"이라고 제재 필요성을 역설했다.
지난해 9월 동의 의결 개시 시점엔 다소 잠잠했던 삼성전자가 올해 들어 브로드컴에 대해 목소리를 키울 때도 퀄컴이 나온다. 삼성전자는 올해 스마트기기 부품 공급처를 퀄컴 등으로 다변화했다고 판단, 브로드컴을 향한 역습에 나섰다는 후문이다. 브로드컴 사건의 시작부터 끝까지 관여한 퀄컴이 최후의 승자라는 평가도 있다. 퀄컴으로선 브로드컴이 과징금을 맞아 신고의 정당성을 얻었고, 삼성전자와는 거래를 늘려 실리도 챙겼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