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에서는 이공계 학생의 거의 절반이 여자에요. 그런데 연구소는 여성 비율이 10%가 채 안 되는 곳도 있거든요. 그 많은 여성 이공계 인재들이 다 어디 갔을까요."
21일 오후 서울 중구 한국일보사에서 만난 주성진(59) 대한여성과학기술인회 회장은 연구 현장에서 여성 인력이 좀처럼 눈에 띄게 늘지 않는 현실을 안타까워했다. "아직 사회가 여성에게 요구하는 것이 많기 때문"이라고 양성평등 문화가 부족한 현실을 에둘러 비판하면서 "여성이 일할 수 있는 탄탄한 환경을 만들어주고 좋은 여성 과학자 롤모델을 보여주는 게 정말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주 회장은 또 "앞으로 인구 감소로 연구인력이 부족해지는 만큼 현재 저조한 여성 과학기술인 활용도를 높여야 할 시점"이라고 덧붙였다.
1993년 창립된 국내 첫 여성 과학자 단체인 대한여성과학기술인회가 지난 20일 만 서른 살이 됐다. 여성 과학자들의 지위 향상과 권익 옹호를 위해 30년 간 무던히 애썼지만, 여전히 할 일이 많다. 과학기술 정부출연연구기관 25곳 중 절반이 넘는 13곳은 책임급 연구원 또는 보직자 중 여성 비율이 10% 미만(2021년 기준)이다.
주 회장은 여성 후배들의 롤모델을 자처한다. 현재 수석연구원으로 몸 담고 있는 국방과학연구소(ADD)의 1호 여성 박사가 바로 그다. "여성을 비서나 행정관리직이 아닌 연구원으로 처음 공개채용하기 시작한 1989년, 친구들을 군대에 보내고 운 좋게 내가 합격했다"는 주 회장의 전공은 수학이다. 박사과정 때는 수학 중에서도 함수의 연속성을 연구하는 해석학 분야를 공부했다.
도대체 수학이 국방과학과 무슨 관련이 있을까 싶지만, 주 회장은 "수학은 모든 공학의 '언어'"라고 힘줘 말했다. 수학이 공학을 연구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되는 수단이라는 의미다. 그가 ADD에서 시작한 연구 주제는 포에서 발생하는 진동이었다. "진동이라는 현상은 공학이지만, 그걸 분석하고 예측하는 모델링의 바탕은 수학"이라고 주 회장은 설명했다.
"포가 얼마나 잘 설계됐는지를 보려면 실제 사격장엘 가야 해요. 당시만 해도 어떤 동료들은 저한테 여자가 사격장에 왔다고 야유를 보냈죠."
지금은 그때와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나아지긴 했지만, 여전히 적잖은 남성 상사들이 여성을 승진시키거나 보직을 맡기기 꺼려하는 게 현실이라고 주 회장은 생각한다. "여성들 역시 기회가 왔을 때 더 적극적으로 책임 있는 자리를 맡아야 한다"고도 했다. 그래야 여성에게 더 많은 발언권이 생기고, 스스로 일을 만들거나 결정하는 핵심 역할을 할 기회가 늘어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기회가 후배들에게로 확대된다.
대한여성과학기술인회는 세계 각국에서 활동 중인 여성 과학자를 발굴해 영문 데이터베이스를 만들고 있다. 현재 400명 정도 자료가 쌓였는데, 벌써 반가운 소식이 들려왔다. 이 데이터베이스를 통해 스페인의 한 기업이 자기들에게 필요한 연구를 하는 한국 여성 과학자를 찾아내서 교류를 시작했다는 것이다. 차세대 과학자를 꿈꾸는 국내외 이공계 여학생들이 모이는 캠프도 주 회장이 역점을 두는 일이다. 학위과정 중이나 연구 초기부터 외국 동료들과 자연스럽게 교류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기 위해서다.
이 모두 여성 과학자들의 국제협력 기반을 다지려는 데 주 목적이 있다. "국제협력이란 게 어느 날 갑자기 되는 게 아니다. 오랜 세월 실력이 쌓이고, 네트워킹으로 신뢰가 축적돼야 비로소 의미 있는 국제협력이 가능하다"고 주 회장은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