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과 중국이 남중국해 생태계 파괴 문제를 놓고 격돌했다. 필리핀이 중국이 남중국해 산호초를 고사시킨다고 지목하자 중국은 억측이라고 맞서며 외교관계가 틀어질 수 있다고 으름장을 놨다. 남중국해 영유권을 둘러싸고 두 나라가 연초부터 팽팽한 신경전을 이어온 상황에서 환경 문제로 갈등이 번졌다.
21일 필리핀 마닐라타임스 등에 따르면, 필리핀 해상경비대는 전날 “남중국해 이로쿼이 암초와 사비나 암초 인근을 조사한 결과 생물의 흔적이 거의 없는 것으로 확인됐다”고 발표했다. 경비대가 공개한 영상을 보면 살아 있는 산호초가 거의 없다. 하얗게 말라 부서진 잔해만 바닥에 떨어져 있다. 이곳은 한때 화려한 산호 군락과 다양한 생물종 서식지로 유명했다.
해상경비대는 “중국 해상 민병대 어선들의 무분별한 어업 활동이 원인이 됐을 가능성이 크다”며 중국을 생태계 파괴범으로 지목했다. 지난 18일 필리핀군 서부사령부도 “중국 선박의 불법 산호초 채취로 해상 생태계가 크게 악화했다”고 주장했다.
중국 해상민병대는 표면적으로는 민간이지만, 국제사회는 사실상 해군이라고 본다. 이들이 분쟁 지역인 남중국해에서 불법 조업을 하거나 인공섬을 만들기 위해 터를 닦는 과정에서 산호초를 대거 파괴했다는 게 필리핀의 논리다.
필리핀 정부는 전방위 대응에 나섰다. 법무부는 “우리는 이미 많은 증거를 갖고 있다”며 네덜란드 헤이그 상설중재재판소(PCA)에 환경 소송을 제기하겠다고 밝혔다. 국방부는 남중국해 주둔 병력을 늘리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외무부는 중국을 거론하진 않은 채 “해역에서 생태학적으로 유해한 활동을 중단해달라”는 호소문을 발표했다. 의회에서는 일부 상원 의원들이 “중국에 해상 환경 파괴 손해배상을 요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중국은 부인했다. 중국 관영 글로벌타임스는 “필리핀이 중국을 환경 파괴자로 낙인찍기 위해 과대광고를 한다”며 “증거 없는 악의적 공격이고, (환경 소송은)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소송을 제기하는 꼴”이라고 주장했다. 이어 “ 필리핀이 남중국해에서 혼란을 조성하려고 하는 것”이라며 “중국과 필리핀의 관계는 더욱 심각한 긴장 상태에 진입하게 됐고, 협력에서 대결로 전환된 책임은 전적으로 필리핀에 있다”고 경고했다.
남중국해 환경 문제를 둘러싼 역내 갈등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중국이 10여 년 전부터 남중국해 제해권을 강화하기 위해 산호초 지역을 매립하고 군용 활주로와 부두 시설 등을 대규모로 건설하자, PCA는 2016년 “중국의 인공섬 건설이 지역 생물 다양성과 산호초 생태계에 돌이킬 수 없는 해를 입히고 있다”고 경고했다.
2021년에는 미국 인공지능(AI) 개발업체 시뮬래리티가 2016년부터 5년간 중국 어선이 떼지어 정박하며 막대한 양의 인분과 오폐수를 쏟아낸 탓에 남중국해 생태계가 회복 불능에 가까울 정도로 재앙을 맞았다고 분석했다. 그러나 중국은 남중국해에서의 활동이 오히려 ‘해양 생태계 보존 목적’이라며 서방과 필리핀의 주장을 무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