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제추행죄는 폭행 또는 협박을 가해 사람을 추행하는 범죄다. 폭행이나 협박이 피해자의 항거(맞서서 반항)를 곤란하게 할 정도여야 죄가 성립한다.”(대법원의 2012년 강제추행죄 판결문 중)
'저항할 수 없을 정도의 폭행·협박'이 있어야 강제추행(성추행)죄로 처벌할 수 있다는 법리가 40년 만에 변경됐다. 김명수 대법원장이 마지막으로 참석한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형법상 폭행 또는 협박 수준만 증명되면 성추행을 인정해야 한다고 판결했다. 추행의 범죄를 확대해 시대적 변화를 반영한 판결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대법원 전원합의체(주심 노정희 대법관)는 21일 A씨에게 "성폭력처벌법상 친족관계에 의한 성추행 혐의는 무죄"라고 선고한 원심을 깨고, 대법원장과 대법관 11명의 다수의견으로 사건을 유죄 취지로 서울고법에 파기이송(원심 파기 후 원심법원이 아닌 다른 법원으로 옮기는 것)했다. 지난해 고등군사법원이 사라지는 바람에 재판권을 넘겨받은 서울고법이 사건을 맡는다.
A씨는 2014년 8월 자택에서 사촌동생 B양을 성추행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A씨는 B양에게 "만져줄 수 있어?"라며 B양의 손을 자기 쪽으로 끌어당겼다. B양이 거부하자 A씨는 "한 번만 안아줄 수 있어?"라며 B양을 안았다. 이어 B양을 침대에 쓰러뜨려 반항하지 못하게 한 뒤 B양의 상체를 만졌다.
항소심 재판부는 성추행 혐의에 대해 "항거를 곤란하게 하는 수준의 폭행 또는 협박이 없었다"며 무죄 판단을 내렸다. △만져달라거나 안아달라는 발언이 있었던 점 △침대에 눕히는 상황에서 저항하지 않았던 점 등을 감안, A씨가 B양의 저항을 곤란하게 할 만큼 공포심을 느끼게 했거나 강력한 물리력을 사용했다고 볼 수 없다는 취지였다.
그러나 대법원 판단은 달랐다. 대법원은 "성추행죄의 폭행 또는 협박은 상대방의 신체에 대하여 불법한 유형력을 행사(폭행)하거나 일반적으로 상대방에게 공포심을 일으킬 수 있는 정도의 해악을 고지(협박)하는 것이라고 봐야 한다"며 "A씨는 B양의 신체에 대하여 불법한 물리력을 행사했으므로 성추행이 맞다"고 판결했다. 대법원 관계자는 "성추행에서 '항거 곤란'이 증명돼야 한다는 기존 법리를 40년 만에 폐기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항거 곤란'은 1983년 대법원 판례에서부터 이어져 온 강제추행죄 법리다.
대법원은 ①강제의 사전적 의미상 성추행에서 항거 곤란을 전제로 한다고 볼 수 없고 ②항거 곤란을 요구하는 건 정조를 수호하는 태도가 반영되어 '성적 자기결정권'과 부합하지 않는다는 점을 판례 변경 이유로 설명했다. 성폭력범죄 피해자에게 '피해자다움'을 요구하는 것이 2차 피해를 야기할 수 있다는 문제 인식에서 판례를 변경했다는 것이다.
법조계는 '미투(Metoo·나도 당했다) 운동' 등으로 높아진 성인지감수성에 대한 사회적 민감도가 반영된 판결이라며 환영했다. 문혜정 여성변호사회 공보이사는 "피해자가 수사·재판에서 '항거 곤란'을 입증하기 위해 피해를 상세히 설명하는 과정에서 2차 가해를 당하는 경우가 대폭 줄어들 것"이라며 "이런 판결 취지가 강간죄 등에도 확장될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대법원은 다만 이번 판결이 '비동의 추행죄'(상대방의 동의 여부만 따져 성추행을 처벌하는 것)를 인정하는 건 아니라고 강조했다. 여전히 형법상 강제추행죄 조문에는 '폭행 또는 협박'이 명시되어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