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쪽으로 기운 육면체가 나열돼 있다. 막힌 면도 있지만, 원형으로 뚫린 곳도 있다. 길게 뻗어 나온 축으로만 연결되기도 했다. 폐쇄성과 개방성. 두 가지를 모두 이야기하는 듯하다.
사람이 등장하면서 주제의식은 좀더 명확해진다. 얌전히 걷거나 주변을 기어 다니던 이들은 이내 빠르게 움직이다 벽에 부딪힌다. 그에게 기회이자 제한의 터전으로 보이는 이 곳의 색은 모두 검정이다.
서울 중구 서울시립미술관을 중심으로 시내 6곳의 공공미술관에서 21일부터 개막하는 12회 서울미디어시티비엔날레에 전시된 미국인 작가 토크와세 다이슨의 설치작 ‘나는 그 거리에 소속된다 3,(힘의 곱셈)’과 안무가 권령은의 공연 모습이다. 작가는 흑인 여성이다. 미국 사회에서 소수자로 살면서 겪게 되는 경험을 상징한 작품이란 설명이다. 작품은 뚫린듯 막힌 경계와 공간성을 상징하는 셈이다.
이같은 주제의식은 이번 비엔날레의 명칭 ‘이것 역시 지도’와 맞닿아 있다. 지도를 키워드로 경계와 공간을 넘나드는 현대인의 정체성을 표현한 국내외 작가 40명(팀)의 현대미술작 61점을 소개한다.
서울시립미술관에 전시된 미국 작가 아구스티나 우드게이트의 설치작 ‘세계지도’도 탈공간·경계화하는 현대인의 정체성을 지도를 매개로 잘 드러내는 작품이다. 이 작품은 지도책을 자동으로 넘겨주는 기계가 지도의 잉크를 계속 지우는 작업으로 시작한다. 하지만 이 기계는 지도를 지운 흔적을 다시 AI(인공지능)로 인식해 기존 지도 대신 새 지도를 모니터에 표출한다. 매일 국가, 인종, 문화의 경계가 해체되는 현실을 보여주는 듯하다.
최찬숙 작가도 미디어아트 'THE TUMBLE'에서 비슷한 정서를 표현했다. 작품은 미국 애리조나주 사막에서 흩날리는 식물의 씨앗을 포착했다. 스스로 뿌리를 절단해 바람을 타고 날아가는 모습이다. 사막에서 살아남으려는 생명의 절박한 몸부림은 경계와 공간을 초월한다. ‘디아스포라’(본토를 떠나 타지에서 자신들의 규범과 관습을 지키며 살아가는 사람들), 작가 자신의 정체성이자 오늘을 사는 대부분의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다.
주요 전시작 작가 중 여성이 많고, 예술감독인 레이첼 레이크스 또한 여성이란 점도 눈에 띈다. 최은주 서울시립미술관장은 "서구식 세계관이나 가치관을 벗어나 현재의 세계 풍경을 구성하는 사회적이고 역사적인 배경을 탐구하는 비엔날레"라면서 “20세기 미술과 대비되는 21세기 미술의 특징 가운데 하나인 유연성, 여성주의, 정신성, 디아스포라 정서 등도 반영했다”고 말했다. 11월 19일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