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상 최저가로 떨어진 국내 온실가스배출권 가격을 정상화하기 위해 정부가 규제를 완화하기로 했다. 기업이 쓰지 않은 배출권을 다음 해에 활용할 수 있도록 이월 제한을 완화하고, 시장참여자를 단계적으로 확대하는 것이 골자다.
정부는 추경호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 주재로 20일 정부서울청사에서 제18차 배출권 할당위원회를 개최하고 이 같은 내용의 ‘배출권 거래 시장 활성화 방안’을 확정했다.
온실가스배출권은 흔히 온실가스 전용 쓰레기봉투에 비유된다. 기업은 봉투에 담길 양만큼의 온실가스를 배출할 수 있는데, 배출량이 그보다 크다면 다른 기업이 가진 봉투를 사서 이를 처리해야 한다. 봉투값, 즉 배출권 가격이 비싸면 기업은 온실가스 감축 노력에 더 힘을 쏟게 된다. 이렇게 시장을 통해 기업의 탄소감축을 유도하는 것이 배출권 거래제도다.
그러나 최근 배출권 값이 급락하면서 제도 효과를 살리지 못하고 있다. 2019년 말 4만950원이었던 배출권 가격은 올해 7월 7,020원으로 떨어져 시행 첫해인 2015년 가격(7,860원)보다도 낮아졌다.
주된 원인은 경기 둔화다. 지난해 제조업 가동률 급감으로 온실가스 배출량이 감소하면서 배출권 수요도 줄었기 때문이다. 통계청에 따르면 지난해 1월 79.7%였던 제조업 가동률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각국 금리인상 등이 이어지며 올해 1월 70.9%로 떨어졌다. 지난해 산업부문 온실가스 잠정배출량도 전년 대비 1,630만 톤(6.2%) 줄었다.
정부는 이월 제한 규제가 배출권 가격 하락을 더욱 부추겼다는 입장이다. 온실가스 배출량이 줄어 배출권이 남아도는 상황인데, 기업이 이를 내년도로 이월하려면 의무적으로 그 절반을 매도하도록 하다 보니 시장에 물량이 많아진다는 것이다. 원래는 기업들이 배출권을 쟁여두기만 해서 가격이 급등하자 이를 막기 위해 2019년 도입한 조치이지만, 불경기와 맞물려 되레 배출권 가격을 낮추는 부작용이 발생했다는 것이다.
정부는 이에 기업이 이월할 수 있는 배출권의 양을 순매도량의 3배로 완화하기로 했다. 또 배출권이 부족한 기업도 부족량보다 더 매수한 뒤 이월하는 것을 허용하기로 했다. 여기에 기업이 외부에서 온실가스 감축 사업을 수행한 실적을 상쇄배출권으로 전환하는 의무 기한도 기존 2년에서 5년으로 연장하기로 했다. 이는 위원회 의결에 따라 올해 배출권부터 바로 적용된다.
배출권 시장 거래 참여자를 확대하는 방안도 추진된다. 현재 배출권은 기업 간 현물거래만 되고 있는데, 위탁거래가 가능하도록 올해 안에 법적 기반을 마련하고 내년부터 증권사·자산운용사 등의 거래 참여를 허용한다는 계획이다. 이에 따라 배출권을 연계한 상장지수펀드(ETF) 등 금융상품이 출시돼 개인들도 간접 투자가 가능해질 것으로 보인다. 정부는 여건에 따라 2025년부터 개인도 배출권을 거래할 수 있는 시장을 조성하겠다는 계획도 밝혔다.
기후환경단체들은 그러나 이번 방안이 미봉책에 불과하다고 지적한다. 산업경쟁력을 이유로 정부가 배출권을 공짜로 나눠준 것이 가격 급락의 근본 원인이라는 것이다. 현재 배출권의 90%는 무상할당분이다. 권경락 플랜1.5 활동가는 “이번 조치로 단기적으로는 배출권 가격이 조정되겠지만 기업의 온실가스 감축 투자로까지 이어지긴 어려울 것”이라며 “과도하게 공급된 무상배출권을 취소하는 등 적극적인 조치가 필요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