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11년이 지났다. 그때는 서러움과 두려움에 한참을 주저앉아 울 수밖에 없었다. 남편의 발인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문이 열리지 않았다. 수천 번도 더 눌러봤을 아파트 공동현관 비밀번호였지만, 어떤 숫자도 떠오르지 않았다. '삐삐삐삑 엥엥엥엥' 오작동을 알리는 경고음만 무섭게 울려댔다. 치매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그의 나이 고작 예순둘. 65세 이하가 겪는다는 초로기 치매, 일명 '젊은 치매'였다.
김운자(73)씨는 그날 이후 밥도 못 먹고 잠도 못 자고, 몇 날 며칠을 울기만 했다. 절망스러웠지만 자식들을 생각하면 정신을 차려야 했다. 옷과 앨범부터 모두 버리고 태웠다. 내가 나를 잃어버렸을 때, 그 모습을 안타깝게 지켜볼 가족들 마음을 생각하면, 그 어떤 흔적도 남기고 싶지 않았다.
"하루를 더 살더라도 흐트러짐 없이 나답게 살고 싶었어요. 자식들에게 짐이 되는 건 죽기보다 싫었으니까요. 저는 이제 내일이라는 건 생각 안 해요. 지금 기자님에게 얘기하는 말도, 조금만 지나면 생각이 안 나고 까먹을 거예요. 그러니까, 지금 이 순간 최선을 다해 살아보자는 생각밖에 안 들죠."
지난달 30일 서울 은평구 치매안심센터에서 만난 김운자씨는 경도 치매 환자다. 기억과 망각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고 있는 김씨는 겉보기엔 별 문제가 없어 보였다. 말하는 속도는 느렸지만, 단정한 말투로 막힘없이 치매 진단 이후 무너져 내렸던 순간을 설명했다.
평범한 주부였던 김씨는 안심센터에서 치매 환자들의 휴식 공간인 '반갑다방' 알바생(자원봉사)으로 일하고 있다. 전국에 총 256곳이 설치돼 있는 안심센터에선 치매 환자 상담과 교육, 가족 지원 서비스 등을 제공한다.
김씨는 일주일에 세 차례 센터로 출근한다. 커피와 차를 주문받으면, 기계에서 뽑아낸 음료를 건네고, 뒷정리를 한다.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이 없다고 자책해왔는데, 이곳에선 달랐다. "같은 아픔을 겪은 사람들과 얘기하고 서로 돕다 보면, 나도 '쓸모 있는 사람'이라는 게 느껴져서 좋았어요."
김씨도 치매 판정을 받은 뒤 처음엔 다른 환자들처럼 은둔했다. 밖에 나갔을 때 자꾸 길을 잃어버리는 게 두렵고 부끄럽다 보니 집에만 머물렀다. 하루 종일 한마디도 하지 않고 지내는 날이 갈수록 늘었다. 문득 좋아하던 노래를 부르고 싶은데도 목소리가 안 나왔다. '이렇게 사라지는 걸까.' 그날 이후 김씨는 집 밖으로 나와 세상과 직접 부딪치기로 결심했다.
김씨는 집(수색)에서 7km 떨어진 치매안심센터를 찾아가는 것부터 도전했다. 왕복 2시간이 걸리는 이동 과정은 험난했다. 처음엔 버스를 잘못 타서 엉뚱한 곳에 내리기 일쑤였다. 살기 위해서라도 자신이 치매라는 걸 주변에 알려야 했다. '나는 경도 치매 환자입니다'라는 내용과 센터 주소를 적은 메모를 손에 쥐고, 길을 잃을 때마다 주변 사람들에게 도움을 청했다. 시행착오 끝에 김씨는 이제 혼자서 버스와 지하철을 척척 갈아타며 무사히 센터까지 도착한다. 가장 붐빈다는 강남역을 혼자 다녀오기도 했다. 치매 '커밍아웃'이 가져다준 자유였다.
그의 삶은 하루하루 도전의 연속이다. "주문받은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뜨겁게 내보낸 적도 있고, 주문 자체를 까먹거나, 재료를 찾지 못해 허둥지둥한 적도 많았지만 이제는 많이 익숙해졌어요." 실수한 날은 집에 가서 밤새 음료 만들기를 복습할 정도로 열정도 넘친다. "10년이 지났는데도 증세가 악화되지 않은 건 기적"(안심센터 고영주 간호사)이라고 할 만큼, 김씨는 '치매 있는 삶'을 너무도 잘 견디고 있다.
김운자씨와 함께 카페 자원봉사에 나선 김무웅(80), 오창옥(72) 부부도 치매를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두 사람은 5년 전 나란히 치매 진단을 받았다. 코로나19 탓에 집에만 머무는 날이 많아지자 상태가 더 악화됐다. "딸들 말고는 (주변에 치매라고) 말을 안 했죠. 남편이랑 매일 집에서 천장만 쳐다보고 있으니까 머리가 더 나빠지는 것 같더라고요." 실제로 오씨는 외출했다가 혼자 길을 잃는 일이 빈번해졌다. 부부는 마음을 고쳐먹기로 했다. "병은 널리 알려야 한다는 말이 있잖아요. 치매도 같은 거예요. 자랑할 건 아니지만, 굳이 숨길 필요도 없는 거죠. 터놓고 얘기해야 도움을 받아요."
치매 실종을 예방하는 데 사회적 관심만큼 절실한 것은 인식 개선이다. 환자와 보호자를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낙인과 편견이 지워지지 않는 한, 치매 환자들은 방 안에 갇혀 있을 수밖에 없다. 고립된 생활이 길어질수록 배회 욕구는 더 커지고 실종 위험도 그만큼 높아진다. 10년 넘게 치매 환자를 진료하고 있는 장기중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아주편한병원 부원장)는 "꾸준한 사회적 교류와 신체 활동이야말로 실종을 예방할 수 있는 근본 해결책"이라고 조언한다.
환자들에게 치매 이전과 이후의 삶이 달라지지 않는 것도 중요하다. 평생을 사진사로 일했던 한창규(65)씨는 치매로 인한 경력 단절을 끊어내고 희망을 찾았다.
"나 찍으러 왔어요? 카메라가 아주 많이 왔네." 지난달 29일 인천광역치매센터에서 운영하는 미추홀구의 두뇌톡톡 뇌건강학교 앞마당. 성큼성큼 걸어 나온 한씨가 먼저 취재진을 반겼다. "내가 쓰던 거랑 다르구나. 엄청 좋다" 그의 관심은 온통 카메라에 쏠렸다. 30년간 인천 연수구에서 사진관을 운영했던 한씨는 전국을 돌며 유치원 단체 졸업사진 등을 찍어주던 출장 전문 사진사였다. 하지만 2018년 뇌출혈로 쓰러지면서 혈관성 치매 진단을 받게 되자 더 이상 카메라를 잡지 못했다. 한씨에게 이후 4년의 기억은 통째로 비어 있다. "정말 아무것도 생각이 안 나요. 심하게 망가진 거죠."
한씨는 퇴원 이후 조금씩 기력을 회복했지만, 삶이 송두리째 뽑혀 나간 뒤였다. 사진관은 문을 닫았고, 가족들은 쉬라고만 했다. 딱히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한씨의 아내는 남편이 속상해할까 봐 카메라를 몰래 버렸다. 그의 인생이 전부 녹아 있는 물건이 없어지자, 인생 전체가 삭제된 것 같았다. "매일 일하던 사람이 집에만 박혀 있으니까, 살아 있는 것 같지가 않았어요."
그는 살기 위해 지난해 4월 다시 카메라를 잡았다. 한씨는 치매 환자의 재능을 지역사회에서 활용하자는 취지로 광역치매센터에서 제안한 프로그램에 응했다. 주민들에게 무료로 가족사진을 찍어 액자를 만들어주는 '가치함께' 사진관의 전속 사진사로 제2의 인생을 시작한 것이다.
한 달에 한 번, 본업으로 돌아오자 한씨 얼굴에는 생기가 돌았다. "자, 여기 재킷 단추 단정히 여미시고, 네 좋아요. 훌륭합니다. 내가 예쁘게 찍어드릴게." 사진 찍으러 온 주민들의 옷매무새를 다듬고, 각도를 조정하고, 능숙하게 긴장을 풀어주는 솜씨까지, 그는 30년 베테랑 사진사다웠다. 반나절이 넘도록 진행된 촬영이었지만 한씨는 힘든 내색 한 번 없이 기운이 넘쳤다. "어르신들 장수사진 찍는 게 얼마나 의미가 있는데요. 얼굴 잘 나왔다고 좋아하니까 저도 너무 보람 있네요."
누군가의 마지막을 기록하는 일에서 삶의 위안을 얻는다고 말하는 한씨. 그에게 자신의 삶은 어떻게 기억되고 있는지 물었다. "질문이 너무 어렵잖아. 그냥 나는 하루하루를 행복하게 살고 싶은 마음뿐이에요. 치매가 있었든 없었든. 한창규라는 사람은 달라지지 않으니까요."
치매에 걸렸다고 삶에서 멈춰야 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치매가 있어도, 치매가 없어도, 우리는 하루하루를 잘 살아가고 싶은 똑같은 사람들이다. 쉴 새 없이 눌러지는 한씨의 카메라 셔터가 대신 말해주는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