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빛조차 없었다. 직장인 박중호(가명)씨는 그날 이후 심장이 떨려 운전대 잡는 것조차 힘들어졌다. 박씨 기억으론 분명 1차선 도로였다. 조수석 앞부분에서 ‘쿵’하는 충돌을 감지한 박씨는 차를 급히 왼편으로 틀었다. 순간, 중앙분리대와 부딪칠까 싶어 핸들을 우측으로 돌렸고, 결국 오른쪽 가드레일과 부딪치며 차량이 멈췄다. 그리고 한 노인이 2차로와 갓길 사이에 쓰러져 있었다.
2020년 1월 14일 저녁 9시쯤 충북 영동군 학산면의 왕복 4차선 국도에서 박씨는 81세 노인 김정기(가명)씨를 쳤다. 익숙한 길도 아니고 업무차 지나가던 초행길이었다. 박씨는 경찰에 신고했고, 김씨는 곧바로 대전의 한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중증외상으로 결국 숨졌다. 속도는 시속 80㎞(제한속도)보다 낮았다.
사고 장소는 사람 통행이 어려운 곳이었다. 중앙분리대와 가드레일이 도로에 설치돼 있었고 여느 국도처럼 인도는 없었다. 한국일보가 지난달 22일 오후 9시쯤 이 도로를 찾았을 때 1분에 차량 두세 대 정도만 지나갈 정도로 적막했다. 주변 가로등도 없어 차량 전조등에 의지해 시야를 확보해야 했다. 당시 김씨는 상하의 모두 검은색 옷을 입었다. 김씨는 사고 당일 오후 8시부터 인근을 배회했고, 국도로 걸어 들어와 사고 지점까지 왔다.
박씨는 교통사고처리특례법위반 치사 혐의로 법정에 섰다. 판결문과 이광원 변호사(박씨 변호인)에 따르면, 김씨는 사건 당일 오후 4시쯤 신경정신과 병원 진료를 받았다. 그는 2018년 5월 치매 진단을 받아 지속적으로 약물 치료를 받고 있었다. 집으로 돌아오던 김씨는 오후 7시쯤 평소 내리던 곳에서 한 정거장 먼저 내려 1시간 동안 마을 반대편으로 이동했다가 정거장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도로에 진입해 사고 지점까지 걸어갔다. 김씨가 배회하던 모습은 폐쇄회로(CC)TV에 찍혔다.
김씨와 오랫동안 알고 지낸 한 마을 주민은 "고등학생 때만 해도 학생회장을 할 정도로 똑똑했던 김씨가 어느 시점부터 이상한 행동을 하기 시작했다"며 "주민들과 잘 어울리지 않고 혼잣말을 하거나, 마을 주변을 배회하곤 했다"고 말했다.
검찰은 운전자 박씨가 전방주의 과실로 2차로 도로변에 있던 김씨를 쳤다고 봤다. 그러나 법원은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1차로로 주행했다는 박씨 주장에도 신빙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김씨가 치매 때문에 사람이 다니지 않는 국도를 배회했고, 박씨가 사고를 예견하지 못했을 가능성도 인정했다. 재판부는 "피해자는 치매를 앓고 있는 81세 노인으로 사고 당일 오후 8시 무렵부터 사고 장소 주변을 배회했다"며 "자동차 진입로를 통해 국도로 걸어 들어와 오후 9시쯤 가로등이 설치돼 있지 않은 사고 지점에 있었던 것으로 보이고, 박씨가 사고를 예견할 수 있었거나 회피할 수 있었는지 여부를 판단할 자료가 전혀 없다"며 박씨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한국일보는 변호인을 통해 박씨에게 인터뷰를 요청했지만, 박씨는 당시 상황을 떠올리고 싶지 않다며 거부했다. 사고의 충격 탓에 차량도 폐차한 것으로 전해졌다. 사고 현장을 세 차례 찾아 탐문한 이 변호사는 "박씨는 당일 정속 운행을 하며 교통법규를 위반하지 않았음에도 가해자 신분이 돼 상당한 부담감을 갖고 경찰 조사를 받았다"며 "피해자가 갑자기 도로로 뛰어들었거나 도로를 무단횡단하던 중 사고가 발생했을 가능성을 인정받았다"고 말했다. 어렵사리 만난 김씨의 배우자는 "남편이 평소 정거장 인근을 배회한 적은 없었는데, 날이 어두워 방향을 착각하고 길을 헤매다 사고를 당한 것 같다"고 밝혔다.
이처럼 배회는 죽음과 맞닿아 있다. 치매 노인에게는 특히 치명적일 수 있다. 교통사고에 노출돼 있는 것은 물론 넘어지면 쉽게 다친다. 산에서 길을 잃거나 급류에 휩쓸리면 발견하기도 쉽지 않다.
본보는 배회 특성이 있었던 치매 노인들의 사망 사례를 추적했다. △실족사 △교통사고 △요양원 사고 등 이유는 다양했다. 그러나 치매 실종자가 사망하면, 경찰은 자료를 삭제하고 사망 배경을 별도로 기록하지 않고 있어 구체적 통계는 확인할 수 없었다.
임호선 더불어민주당 의원실을 통해 확보한 경찰청의 실종 치매환자 사망 현황(2016년 3월~2023년 6월)을 보면 지난 7년간 761명이 배회하다가 사망했다. 한 해 평균 1만 명 이상이 치매 증상으로 실종되고 100명 넘게 배회하다 숨지는 걸 감안하면, 실종자 가운데 1%는 숨진 후 발견되는 셈이다. 하지만 실제 사망자는 이보다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김씨의 사례처럼 실종신고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 사망하면 통계에 잡히지 않는다. 독거노인이 배회하다 숨지면 아예 신고조차 되지 않을 수도 있다.
다른 교통사고도 김씨 사망 사건과 유사하다. 덤프트럭 운전사가 자동차전용도로를 횡단하던 치매 노인을 사망하게 해 기소된 사건은 항소 끝에 무죄를 받아냈다. 운전자는 2016년 11월 9일 새벽 5시 53분 충북 청주시 청원구의 편도 3차로 중 2차로를 달리다가, 도로를 횡단하던 79세 노인을 발견하지 못하고 차량 우측 앞부분으로 들이받았다. 1심은 피해자가 사망해 사고 결과가 중하다며 금고 6개월에 집행유예 1년을 선고했다.
운전자는 항소했다. 주의 의무를 다했음에도 도로에 치매 노인이 갑작스럽게 나타나 피할 수 없었다는 점을 강조했다. 당시 도로에는 보행자 진입을 막고자 철제 방호 울타리가 설치돼 있었다. 일출 전이라 시야 확보가 어려웠고, 피해자가 검은색 상의와 짙은 남색 바지를 입고 있었던 점도 고려됐다. 재판부는 "피고인은 과속하지 않았고, 술에 취한 상태도 아니었다"며 "피고인이 충분히 주의했더라도 도로에 있었던 망인을 발견하는 게 쉽지 않았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판단했다.
배회 탓에 요양원에서 발생하는 사고도 흔하다. 치매 환자들이 요양원을 탈출하려다 낙상으로 사망하거나, 탈출 후 배회하다가 농수로 등에 빠져 실족사하기도 한다. 2021년 6월 14일 밤 11시쯤 최영석(77·가명)씨는 수도권 요양원의 발코니 4층 창문에서 뛰어내렸다. 다행히 2층으로 떨어졌지만, 다발성 골절과 좌상으로 결국 사망했다. 최씨가 입소한 지 한 달도 안 된 시점이었다. 법원은 지난 4월 1심에서 요양원 시설장과 요양보호사에게 각각 벌금 1,500만 원과 벌금 1,000만 원을 선고했다.
판결문을 보면 시설 밖으로 나가려는 최씨의 행동은 뚜렷하고 반복적이었다. 최씨는 집 밖으로 나가려는 증상이 심해 요양원으로 보내졌다. 사건 당일 오후 8시에도 시설 출입문을 열어 밖으로 나가려는 것을 요양보호사가 제지했다. 요양원 관계자를 만나 확인한 결과, 최씨는 망상과 환청 증세가 있었다. 최씨는 요양보호사들에게 "문재인 전 대통령으로부터 연락이 왔다"거나 "문 대통령이 아들을 총사령관으로 임명하려고 하니 아들한테 연락해야 한다"고 말했다고 한다.
요양원 관계자는 최씨 사망 이후 공황장애를 앓고 있다. 요양원 측은 "당시 근무조였던 요양보호사가 저녁 8시 30분쯤 어르신이 방에서 주무시는 걸 확인했는데, 자정쯤 발코니로 이동해 방충망을 뜯고 의자로 올라가 창문에서 떨어졌다"며 "평소 어르신이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곳인데 그곳에 왜 갔는지 이해가 안 된다"고 했다.
요양원도 치매 환자들의 배회 특성을 고려해 만반의 대비를 한다. 8층 건물을 통째로 쓰는 수도권의 한 요양원은 층층마다 비밀번호를 입력해야 열리는 자동문을 설치해 놨다. 예기치 못한 사고를 막기 위해서다. 그러나 무용지물이 될 때가 많다. 인지 저하가 심하지 않은 환자들이 비밀번호를 유심히 보고 몰래 외워 문을 열고 나가기 때문이다. 문이 열리는 순간을 노려 재빨리 탈출하려는 환자들도 많다. 자동문에 '문이 열린 뒤 한번 더 뒤를 보세요'라는 안내문이 적혀 있는 이유다.
10년 경력의 한 요양보호사는 "96세에 몸집은 매우 작았지만 걸음걸이가 빨라 '빛의 속도'로 다니는 어르신이 있었는데, 이분은 벽에 바짝 붙어 숨어 배회했다"며 "현관문만 열리면 1층으로 질주하는 바람에 쫓고 쫓기는 추격전이 2년간 반복됐다"고 말했다.
요양보호사 부족과 과로도 사고 원인으로 지목된다. 최씨 추락사고 때도 야간에 노인 9명을 요양보호사 한 명이 관리하고 있었다. 저녁 6시에 출근해 다음 날 9시까지 혼자서 노인들을 돌보는데, 배회 및 폭력적 성향의 치매 노인이 한 명이라도 있으면 나머지 8명에게 상대적으로 소홀할 수밖에 없다. 요양원 관계자는 "혼자 밤샘 근무를 하다 보면 집중력이 떨어질 때가 있다"며 "최씨 사고도 업무 매뉴얼상 휴게시간 30분 전에 발생했다"고 말했다.
배회를 막다가 얘기치 못한 폭행·충돌 사고로 이어질 때도 있다. 몸이 약한 치매 노인은 넘어져 크게 다치거나 숨지기도 한다. 서울 도봉구의 한 요양원에 입소한 정춘자(80·가명)씨는 주변을 배회하는 습성에 폭력성까지 있었다. 4년 전의 그날도 마찬가지였다. 정씨는 2019년 3월 7일 새벽 2시 40분쯤 로비를 배회하다가 다른 병실로 들어가려고 했다. 결국 이를 제지하던 요양보호사와 실랑이를 벌였고, 그 과정에서 중심을 잃고 넘어졌다. 정씨는 허벅지뼈(대퇴골 경부) 골절상을 입었고, 사고 발생 9개월 후 사망했다.
법원은 요양보호사에게 금고 8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 정씨가 요양보호사를 때리려고 오른손을 높이 들다 중심이 흔들려 넘어진 건 맞지만, 치매 환자를 돌보는 요양보호사가 업무지침 등에 따라 피해자의 폭력적 행동을 유발하지 말았어야 했다고 봤다. 법원은 "사고 발생 한 달 전부터 피해자의 증세가 악화돼 야간에 다른 방을 전전하며 배회하는 횟수가 늘었다"며 "(피고인은) 평소에도 치매 환자에 대한 전문적 지식을 보유했기에 피해자의 돌발적이고 폭력적 행위와 그에 따른 낙상사고를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어야 했다"고 설명했다.
배회하는 치매 환자들은 절도 사건에 휘말리기도 한다. 특정 물건에 대해 집착하는 성향이 절도로 나타나는 것이다. 피해 금액은 양말 한 켤레(3,000원), 음료수 1병(2,100원) 등으로 많지 않다. 그러나 피해자 입장에선 반복되는 절도에 결국 경찰에 신고할 수밖에 없다.
2년 전 전두측두엽 치매 진단을 받았던 강정매(가명)씨는 지난해 10월 공용물건손상 및 절도 혐의로 기소됐다. 인지기능 저하와 함께 충동조절 장애, 과격한 행동, 배회 증상이 함께 온 탓에 수차례 절도를 이어갔기 때문이다. 경기 부천시 괴안동에 살았지만, 물건을 훔친 곳은 서울 성북구와 중랑구 일대였다. 대부분 편의점 등에서 아이스크림 등 1만 원이 넘지 않는 음식물을 훔쳤는데, 가장 비싼 물건은 지난해 10월 중랑구의 한 뷰티 스토어에서 훔친 4만7,000원짜리 보습제였다.
다만 법원은 강씨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수사관과 전혀 대화가 이뤄지지 못할 정도로 인지 능력이 저하돼 있었고, 일상생활이 어려워 가족들이 수발하느라 어려움을 겪고 있었기 때문이다. 법원은 "강씨는 법정에서 이름, 직업, 주소 등을 묻는 일상적 질문에도 전혀 대답하지 못했다"며 "이런 사정을 고려하면 범행 당시 심신상실 상태로 보는 게 타당하다"고 봤다.
요양보호시설 관계자는 "어떤 어르신은 휴지에 집착한 나머지, 속옷 서랍까지 뒤져 숨겨둔 휴지까지 훔쳐 간다"며 "적절한 치매약도 없고 증세가 심해질 대로 심해져 시설에서 못 나오게만 해달라고 요청하는 보호자도 있다"고 전했다. 그러면서 "자식들과 연락이 안 되고 배신감이 커질수록 어르신들의 배회 욕구는 더 커지는 것 같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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