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스모스가 가사에 들어있는 대표적 가요를 꼽으라면 ‘코스모스 피어 있는 길(김상희, 1967)’과 ‘고향역(1972, 나훈아)’이 있다. 가수와 작곡가가 가을이나 고향의 정취를 공감하기 위한 것이었으니, 노래가 나오기 이전부터 많이 보았던 친근한 꽃이었을 것이다. 요즘 한창 꽃이 피기 시작하였으니 추석이 되면 고향 길가에서 쉽게 만날 수 있는 코스모스이다. 어릴 적 화단에 많이 심었던 기억은 있지만 언제 어떤 연유로 우리나라 전역에 심겨 자라게 된 것인지 궁금해진다.
리휘재 박사의 ‘한국식물도감(1964)’에는 코스모스가 우리나라에 도입된 시기가 1929년 이전이라 기재되어 있지만, 1937년 그가 공동집필에 참여하여 편찬한 ‘조선식물향명집’에는 코스모스에 대한 기록이 없다. 아마도 경관용으로 심기 시작한 때는 그 이후인 것으로 보인다.
우장춘에 대한 최초의 평전이라 할 수 있는 ‘인간 우장춘(농진회총서1, 1984)’에 전국 철로 주변이나 길가에 코스모스를 많이 심은 것이 그의 조언에 따른 것이라는 내용이 있다. 당시 교통부 고위 간부가 예산을 적게 들이면서 기찻길과 도로변 경관을 가꿀 수 있는 식물을 문의했는데 이때 우장춘 박사가 코스모스를 추천했다고 한다. 한 번 심어 씨앗을 많이 얻을 수 있고, 소나 돼지가 먹지 않는 식물이라 농민들이 꼴로 베어 갈 걱정도 없다는 이유였다는데, 당시 상황을 잘 살핀 매우 현명한 판단이라 생각한다.
1950년 귀국 직후부터 3년간 한국전쟁을 겪어야 했고, 변변한 연구시설과 인력이 없어 제대로 된 연구를 할 수 없을 때였지만, 9년 남짓의 짧은 기간 우장춘 박사가 우리나라 농업에 끼친 영향은 너무나 크고 소중한 것들이다. 씨 없는 수박을 실증하여 교잡육종의 중요성을 알리고 김치를 담그기에 좋은 속이 꽉 찬 배추육종을 가능케 한 것과 대관령 씨감자 생산과 제주도 유채 보급으로 부농을 이루게 한 것 때문인지, 우장춘은 채소 육종가로 많이 알려져 있다. 그러나 평생 그가 쓴 20여 편의 논문 중 절반 이상은 꽃에 대한 것이다. 1926년 일본 유전학회지에 발표한 첫 논문의 연구재료도 나팔꽃이고, 1950년 마지막 논문도 앵초에 대한 내용이다. 귀국 이후에도 연구를 계속할 수 있었다면, 그가 육종한 겹꽃 피튜니아로 세계적인 육종회사로 성장한 사카다종묘처럼 우리나라에도 글로벌 육종회사가 생겼을지도 모를 일이다.
추석이 다가오고 있다. 많은 이들의 마음도 벌써 고향을 향해 달려가고 있을 것이다. 올여름 폭염과 폭우를 이겨내고 길가에 핀 코스모스를 만나게 되면 힘겹게 황금 들녘을 이룬 농부들과 나라가 어려울 때 헌신한 분들의 화안(花顔)을 잠시나마 떠올려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