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산 한 번 바뀌니.. '보좌관' 같은 반려견도 힘겨워하네요”

입력
2023.09.19 09:00
반려 고수를 찾아서

서울 성산동에 위치한 우리동생동물병원을 찾은 반려견 ‘이민승’(10)을 만난 건 지난 1월이었습니다. 보호자 대기실에서 만난 민승이는 활기차 보였습니다. 겉으로 봤을 때 건강에도 크게 문제는 없어 보였습니다. 민승이 보호자 이향숙 씨와 잠시 대화를 나누는 동안에도 민승이는 향숙 씨 곁에 얌전히 앉아 있었습니다.

그런데, 민승이의 진료 순서가 다가오자 갑자기 민승이가 불안한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민승이는 짖거나 도망치지는 않았지만, 어떻게든 진료실로 들어가지 않으려 하는 듯, 병원 문 앞에서 버티고 있었습니다. 결국 향숙 씨가 여러 차례 어르고 달래며 진료실에 들어갔습니다. 대기실에서 한껏 솟아올랐던 민승이의 꼬리는 어느새 축 처져 있었습니다.


원래는 진료실에 곧잘 들어가던 녀석이었는데, 이제 어떤 일이 기다리고 있는지 아니까 그러겠죠. 근데, 그래도 어쩔 수 없어요.

건강해 보이던 민승이에게 무슨 일이 있는 걸까요? 의외로 민승이를 괴롭히는 건 대수롭지 않아 보이는 ‘항문낭염'이었습니다. 민승이는 2년 전 심한 항문낭염을 앓았습니다. 향숙 씨는 “민승이가 다소 불편해 보이는 기색을 보이기에 몸을 살펴보다가 엉덩이에 붉게 화농이 잡힌 모습을 목격했다"고 당시를 떠올렸습니다.

항문낭염은 가정생활을 하는 반려동물에게 잘 나타날 수 있는 질병입니다. 민승이를 진단하는 우리동생 김재윤 원장은 “항문낭염은 특히 반려견에게 더 잘 나타나는 질병"이라고 합니다. 항문낭액은 윤활제 역할을 해 대변을 항문 밖으로 내보내도록 돕습니다. 단단한 대변이 항문낭을 누르면 항문낭액이 배출돼 대변을 감싸는 형식이죠.

그런데, 육식동물인 고양이에 비해 잡식성에 가까운 개는 대변이 더 무른 편이고, 항문낭을 압박할 정도로 대변이 단단하지 않습니다. 그러다 보니 배출되지 않고 남아 있는 항문낭액이 고여서 항문낭염으로 이어집니다. 그래서 개를 키우는 베테랑 반려인들은 주기적으로 항문낭을 짜서 항문낭액을 배출해야 한다는 걸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민승이의 항문낭염은 보호자가 항문낭을 소홀히 관리해서 생긴 걸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보호자 향숙 씨는 현재 임시보호하는 강아지들을 포함해 7마리와 함께 생활하고 있습니다. 이 친구들의 항문낭을 항상 손수 짜주는 일을 마다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러나, 민승이는 아무리 항문낭을 짜려 해도, 잘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원인은 민승이의 신체구조였습니다. 김 원장은 "프렌치 불도그 등 일부 품종의 경우 항문이 엉덩이 안쪽 깊이 들어가 있어서 항문낭 짜기가 어려운 경우가 있다"며 “민승이도 혼종견이지만, 항문이 그 품종들과 비슷한 신체 구조를 보인다"고 설명했습니다.

그래서 민승이의 항문낭은 주기적으로 동물병원에서 짜게 됐습니다. 그게 민승이에게는 꽤나 안 좋은 기억으로 남아 있는 듯합니다. 진료실에 가면 항문 깊숙이 손을 넣어 항문낭을 짜고, 심한 경우에는 항문낭액을 긁어내듯 짜내서 민승이가 통증도 느낀다고 합니다. 그때마다 향숙 씨는 동물보건사 선생님과 민승이를 안고 달래주곤 한다고 합니다.


말 한마디에 반려인 속내를 바로 알아채는 ‘이심전심’

민승이는 10년 전인 2013년, 향숙 씨의 반려견이 됐습니다. 경기 평택시의 어느 다리 밑에서 떠돌이로 지내던 민승이는, 당시 지역에 위치한 사설 보호소 관계자들이 구조해 데리고 있었다고 합니다. 향숙 씨는 당시 키우던 개 두 마리를 모두 질병으로 떠나보낸 뒤였습니다. 향숙 씨는 주변 사람들로부터 이 사설 보호소에서 입양을 권유받아 민승이를 처음 만나게 됐습니다.

향숙 씨는 민승이가 지내던 환경이 지금도 생생하다고 말합니다. 민승이는 당시 태어난 지 6개월쯤으로 추정되었다고 합니다. 작은 개 30~40마리가 한꺼번에 한 방에 지내고 있을 만큼 열악한 환경이었다고 해요. 당시에는 지금보다 유기동물이나 반려문화에 대한 인식이 더 자리 잡지 않은 때라 더욱 안타까웠죠. 이날 향숙 씨는 민승이와 함께 ‘은실이’라는 반려견 두 마리를 입양했습니다.

그런데, 입양 첫날부터 향숙 씨는 민승이가 특별하다는 사실을 알았다고 합니다. 민승이는 서울로 돌아올 때에도 불안한 기색을 한 번도 보이지 않았다고 해요. 더 놀라운 건 집에 들어가자마자 제 집인 양 편안하게 생활을 했다는 사실입니다.

지금 생각해도 대단하다 싶은 게, 낯선 집에서 청소기 소리가 나면 대부분 개들은 도망가잖아요. 은실이도 그랬거든요. 근데 민승이는 안 그랬어요. 느긋하게 자리만 피해주고 불안해하거나 그런 행동을 전혀 보이지 않았죠.

게다가 민승이와 함께 생활하면서 반려견 교육을 굳이 할 이유가 없었다고 합니다. ‘앉아’ 같은 기본 지시어 교육은 했지만, 그 외에는 보호자의 마음을 읽는 것과도 같은 행동을 수차례 보여줬다고 해요. 산책을 다녀오고 헐떡이는 민승이에게 “저기 가서 물 좀 마셔”라고 혼잣말하듯 말해도, 말을 알아듣는 듯 물을 마시러 가는 모습은 이제 놀랍지도 않을 정도라네요.


파트너 혹은 보좌관 같은 강아지.. “언제 이렇게 늙었니”

향숙 씨는 2016년 말부터 유기동물 임시보호 봉사활동을 지속적으로 해왔는데, 이 친구들이 가정생활에 적응하도록 돕는 일등공신도 민승이라고 합니다. 향숙 씨의 집에서 가장 오래 산 만큼, 다른 개들을 이끄는 리더와도 같은 존재인 겁니다.

저도 피곤할 때가 있잖아요. 그런데 아이들이 침대에 올라와요. 그러면 다소 힘든 목소리로 ‘민승아~’라고 하면 곧바로 제 말을 알아듣고 아이들을 전부 침대 밑으로 내려가게 하고 문밖으로 데리고 나가요. 말투에서 나온 제 심리를 바로 알아채는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요?

그래서 향숙 씨는 민승이를 ‘보좌관’이라고 표현했습니다. 많을 때는 향숙 씨 집에서 한 집에 15마리가 함께 생활할 때도 있습니다. 그때마다 다른 강아지들을 돌보는 민승이 없이는 임시보호 봉사를 제대로 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 겁니다.

그렇기에 최근 민승이의 노화가 빠르게 진행되고 있는 건 향숙 씨에게 안타까움으로 다가오고 있습니다. 단순히 도움만 되는 게 아니라, 자신의 마음을 알아주는 반려견이 점점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기 어렵다는 의미입니다.

최근 민승이는 백내장 진단을 받았습니다. 현재 백내장이 확연하게 눈에 영향을 미치는 정도는 아니지만, 노령동물의 대표격인 질병이 생겼다는 것만으로도 세월의 흐름을 짐작게 했습니다. 게다가 담낭에 점액낭종이 발견돼 담즙 분비가 다소 원활하지 않다는 점도 주의 깊게 살펴봐야 할 부분이라고 합니다. 김 원장은 “두 질병 모두 지금 당장 삶에 영향을 끼치는 건 아니다”라면서 “그저 나이가 들어서 생기는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보는 게 맞다”고 설명했습니다.

그럼에도 김 원장은 민승이와 향숙 씨가 앞으로도 당분간은 잘 지낼 것 같다고 내다봤습니다. 향숙 씨가 오랫동안 유기견 임시보호 및 입양 봉사활동을 하면서 쌓인 경험을 믿는 겁니다. 김 원장은 “경험이 많아서 그런지 아는 것도 많다”며 “무슨 일이 생기면 곧바로 알아채고 병원을 찾아올 사람”이라고 말했습니다.

향숙 씨에게 앞으로 민승이와 어떤 반려생활을 생각하는지를 마지막으로 물었습니다. 그의 대답은 유기동물 임시보호 봉사를 하는 사람다웠습니다.


우리나라에서 한 가족과 함께 생을 마지막까지 보내는 반려동물이 많지 않잖아요. 그런 유기견 아이들의 가족을 찾아주는 데 도움을 많이 준 민승이만큼은 마지막까지 제 곁에서 행복하게 있다가 가게 해주고 싶어요.
이제 여기저기 아프기 시작하는 것 같은데, 이 아이가 병 때문에 힘들어하는 순간이 오면 저는 무조건 얘의 입장에서만 판단할 거예요. 만일 그게 안락사라고 하면 그걸 따라야 할 수도 있겠죠. 그런데 그전에는 최대한 할 수 있는 건 다 해보고 싶습니다. 그게 제게 10년간 특별한 반려견으로 살아온 민승이에게 해줄 수 있는 모든 게 아닐까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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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진욱 동그람이 에디터 8leonardo8@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