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넥슨의 대규모 다중사용자 온라인 롤플레잉 게임(MMORPG)인 '프라시아 전기'에는 철강 기업 포스코의 상표가 붙은 아이템 '판타스틸'이 등장했다. 9월 초까지 한정된 기간이긴 하지만 이용자들은 판타스틸을 모아 실제 강화 능력을 얻을 수 있었다.
이벤트와 동시에 공개된 유튜브 영상은 더욱 화제였다. 10원 크기로 25톤의 하중을 견디는 초고강도 강판 '기가스틸', 경량화 솔루션 '멀티머터리얼'과 불에 강한 '불연컬러강판' 등 포스코의 제철 기술을 활용해 적과 전투에서 승리했다는 내용으로 이야기를 풀어냈다. 워낙 관심을 모으다 보니 영상 조회수는 한 달이 지나지 않아 2,000만 회를 넘겼다. 댓글에는 "지금껏 봤던 컬래버 중 최고의 협업" "게임으로 더욱더 친숙하게 다가갈 수 있도록 해주는 영상" 등 호평이 가득하다.
포스코는 10월 탄소중립 추진 노력과 의지를 담은 2편 영상 '그린스틸이 만든 미래' 공개를 준비하고 있다. 포스코 관계자는 "2030세대들이 철강 산업을 좀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게임과 손잡게 됐다"면서 "특히 게임을 즐기는 젊은 세대들이 게임의 티저(짧은 예고편 형태 광고)를 매우 긍정적으로 대하기 때문에 그 접근성을 고려해 협업했다"고 강조했다.
넥슨과 포스코의 만남은 지식재산권(IP)을 활용하는 게임 산업이 다방면으로 협업을 늘려 가는 사례로 볼 수 있다. 그동안은 음식이나 의류 등 젊은 세대에 익숙한 소비재 내지는 게이밍용 주변기기 정도가 협업 대상이었다면 이제는 게임사의 비(非)게임 콘텐츠 제작 능력과 게임에 활용하는 기술력이 고도화하면서 쉽게 상상할 수 없었던 분야에서도 게임사와 비게임사의 손잡기가 등장하고 있는 것이다.
게임업계가 최근 들어 진출한 메타버스 영역에선 금융업계와 협업이 잦다. 넷마블과 하나금융그룹은 4일 전략적 업무협약(MOU)을 체결하고 소셜 게이밍 기반의 오픈월드 '그랜드크로스: 메타월드' 내부에 하나금융 전용 서비스를 구현하는 등 공동 마케팅을 진행할 예정이다. 그랜드크로스: 메타월드는 실제 도시 형태를 구현한 메타버스 공간을 배경으로 한 오픈월드 게임인데 여기에 하나은행이나 하나증권 등이 입점할 수 있다.
앞서 금융권은 메타버스가 유행할 때 네이버의 '제페토'나 게임 '로블록스'와 협업해 앞다퉈 가상 공간을 만들었다. 젊은 세대의 관심 외에도 가상자산을 활용할 수 있다는 전망 때문이었다. 하지만 현재는 이용자가 급감했는데 대부분 보여주기 수준에 머물러 유명무실하다는 평가가 많았기 때문이다. 넷마블 관계자는 구체적 사업 계획은 아직 논의하고 있다면서 "하나금융과 함께 차별화한 서비스를 고민해서 진행할 방침"이라고 말했다.
게임 회사들이 보유한 기술 즉 '게임테크(Gametech)'에 대한 관심도 커지고 있다. 실감 나는 게임 경험을 제공하겠다는 목표 때문에 고도화한 그래픽·프로그래밍·통신 기술 등이 다른 영역에 활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게임 개발을 목적으로 만들어진 3차원(3D) 그래픽 엔진은 이미 산업 영역에서 쓰인 지 오래다. 설계와 실험을 가상 공간에서 대신하는 '디지털 트윈'으로서다. 에픽게임즈의 언리얼 엔진은 한국항공우주산업(KAI)의 VR 비행 훈련 시뮬레이터 개발에 활용됐다. 유니티테크놀로지스의 엔진 유니티는 현대자동차의 스마트팩토리를 가상 공간에 그대로 구현한 '메타팩토리' 구축에 쓰였다. LG CNS는 유니티를 기반으로 물류 센터에 디지털 트윈을 통한 통합 모니터링 시스템을 만들었다.
인공지능(AI)도 게임과 동반해 발전한 기술 중 하나다. 엔씨소프트는 8월 국내 게임사 최초로 자체 개발한 거대언어모델(LLM) 바르코(VARCO)를 알렸다. 엔씨는 이를 디자인이나 가상 캐릭터 등 게임 개발에 활용하는 데 그치지 않고 다른 영역에도 전개하려 준비 중이다. 지난달 12일에는 자율주행로봇 전문기업 트위니와 '로봇 제어 솔루션' 연구 개발을 위해 협력한다고 발표했고 앞서 7월에는 연합뉴스·드림에이스와 '차량용 AI 뉴스 솔루션' 개발에 나선다고 밝혔다.
엔씨소프트의 최종 목표는 '버추얼 휴먼(가상인간)'이기에 최대한 다양한 분야의 데이터를 모으는 작업이 필요하다. 엔씨소프트 관계자는 "다른 분야에 AI 기술을 제공하면 바르코가 여러 분야의 데이터를 학습하는 윈윈 관계를 만들 수 있다"면서 "앞으로도 바이오, 교육, 금융 등 다양한 분야의 기업들과 손잡을 계획"이라고 밝혔다.
게임 산업이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인 콘텐츠 비즈니스 성격을 띠고 있어 새로운 수익성 사업 발굴이 절실해 게임테크의 활용은 하나의 해결책이 될 것으로 보인다. 엔씨와 디지털 휴먼 연구를 진행하고 있는 유영재 연세대 인공지능학과 교수는 "게임에 생성형 AI를 접목한 경험들이 게임업계뿐 아니라 디지털 휴먼이나 신사업으로 이어질 수 있다"면서 "게임업계가 그래픽과 코딩 능력을 바탕으로 업계를 선도할 수도 있다"고 전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