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료사고 손해배상 소송에서 환자 측이 '개연성'만 입증해도 의료진 과실과 사망 간 인과관계를 인정해야 한다는 대법원 판결이 나왔다. 의료사고 소송에서 환자 측 입증 부담이 줄어들 계기가 될 것으로 보인다.
17일 법조계에 따르면, 대법원 1부(주심 김선수 대법관)는 수술 후 사망한 A씨 유족이 병원을 상대로 제기한 1억6,000여만 원 상당의 손해배상 소송에서 최근 원고 일부 승소 판결한 원심을 확정했다.
해당 병원 마취과 전문의 B씨는 2015년 12월 A씨를 전신마취한 뒤 간호사에게 상태 점검을 지시하고 수술실을 비웠다. A씨의 혈압이 계속 떨어지자 간호사는 35분간 4차례나 B씨에게 전화했지만, 의사는 혈압상승제를 투여하라는 지시만 하다가 마지막 전화를 받고서야 수술실로 돌아왔다. 심폐소생술 등 뒤늦은 응급처치에도 A씨는 결국 사망했고, 유족은 병원 측을 상대로 소송을 냈다.
하급심은 "병원은 유족에게 9,280여만 원을 배상하라"고 판결했다. 재판부는 "B씨가 마취 유지 중 감시업무를 소홀히 한 데다 간호사 호출에 즉시 대응하지 않아 과실과 사망 사이의 상당한 인과관계가 인정된다"고 밝혔다. 다만 의료진이 제때 심폐소생술을 시행했더라도 몸 상태가 나빠졌을 가능성이 큰 점 등을 고려해 병원 측 책임을 60%로 제한했다. 대법원도 원심 판단에 문제가 없다고 봤다.
대법원은 이번에 의료사고 민사소송에서 원고 측 입증책임을 완화하는 법리를 새롭게 정립했다. 종전에는 환자 측이 △'일반인의 상식'선에서 의료상 과실이 있었다는 점과 △피해가 다른 원인 없이 의료 행위만으로 발생했다는 점을 입증해야 승소할 수 있었다.
그러나 대법원은 "환자 측이 통상의 의료인에게 요구되는 주의의무 위반과 의료상 과실이 환자 측 손해를 발생시킬 개연성이 있다는 점을 증명한 경우, 진료상 과실과 손해 사이의 인과관계를 추정해 인과관계 증명 책임을 완화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설명했다. 현대의학 지식이 불완전한 만큼, 진료 과실과 사망 간 인과성을 환자 측이 제대로 파악하기 어려운 점을 감안한 것이다. 이어 "개연성은 의학적 측면에서 의심이 없을 정도로 증명될 필요는 없다"고 덧붙였다.
물론 제한 요건도 뒀다. "해당 과실과 손해 사이의 인과관계를 인정하는 것이 의학적 원리 등에 부합하지 않거나, 과실이 손해를 발생시킬 막연한 가능성이 있는 정도에 그치는 경우에는 증명됐다고 볼 수 없다"고 밝혔다.
또 형사소송에선 입증책임을 엄격하게 판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대법원은 A씨를 사망하게 한 혐의(업무상과실치사)로 재판에 넘겨진 B씨에게 유죄를 선고한 원심을 깨고 사건을 서울중앙지법에 돌려보냈다. 대법원은 "B씨가 심폐소생술 등의 조치를 했다면 A씨가 사망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점에 대한 검찰의 증명이 부족하다"며 "의료행위 과정에서 업무상과실치사 혐의는 '합리적 의심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증명돼야 한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