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는 우리 모두 각성을 통해 붓다가 되라고 역설한다. 이는 기독교 같은 유신(有神) 종교가 천국을 목적으로 하는 것과는 다르다. 불교가 붓다가 되는 종교라면, 유신 종교는 신이 되지는 못한다. 이렇다 보니, 붓다는 ‘맹목적인 존중’을 받지 못한다.
인류 문명사에는 다양한 종교가 등장한다. 그러나 불교만큼 교조(敎祖)를 가볍게 대하는 종교도 없다. 당나라 말기 선불교의 고승인 운문문언(雲門文偃ㆍ864~949)에게 한 승려가 물었다. "어떤 것이 붓다입니까?" 그러자 운문은 “마른 똥 막대기니라.” 불교의 이상인 붓다를 가장 낮고 천한 대상과 일치시켜, 일상의 보편을 강조한 파격적인 대답이다.
붓다는 신들의 세계에는 존재하지 않는, 인간계에만 출현하는 인간의 완성자다. 그리고 그 완성은 귀천과 성속(聖俗)에 관계없이 모든 곳에 통하는 일상의 환기된 가치일 뿐이다.
그런데 왜 하필 '마른 똥 막대기'일까? 이에 대해서는 이해가 쉽지 않다. 때문에 '똥을 치우는 데 사용되는 막대기'라거나 '더러워져서 하잘것없는 막대기'라는 것, 또는 똥 덩어리를 지칭하는 표현이라는 등 다양한 얘기가 있었다.
그러나 똥 막대기는 많은 승려가 살던 옛적 사찰의 화장실 문화를 반영한 것이다. 과거 화장실에는 뒤처리 용품이 용이하지 않았다. 특히 대규모 시설에서는 더욱 그랬다. 이때 대두된 것이 막대기다. 승려들은 인도 문화에 따라 물로 뒤처리한다. 그러므로 큰 장애물(?)만 막대기로 긁어 해결하고 물로 마무리했다. 이때 사용된 막대기는 화장실 한쪽에 꽂아 놓고, 마르면 큰 이물질만 털어낸 뒤 재사용했다. '설마?'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오래전임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이게 마른 똥 막대기의 정체다.
2002년 백제 왕궁리의 화장실 유적에서 다듬어진 나무막대 6개가 출토됐다. 다듬어진 모양새를 보면, 일회용이 아니라 반복 사용된 물건임을 알 수 있다. 마른 똥 막대기는 여러 번 사용하다가 버려지는 공중 화장지 같은 물건이다. 꼭 필요하지만, 동시에 하찮은 물건이라는 말씀.
불교에서 붓다는 목적이자 이상이다. 그러나 이는 내가 붓다가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극복해야만 하는 대상이기도 하다. 즉 뗏목은 강을 건너는 이에게는 필요하지만, 동시에 강을 건넌 이에게는 버려지는 가치라는 말씀.
또 불교에서 말하는 진리는 다이아몬드 같은 특별함이 아닌, 공기나 햇빛처럼 보편을 흐르는 실존적인 위대함일 뿐이다. 불교에서 진리는 반드시 이래야 한다고 역설한다.
이 같은 두 가지 측면으로 인해, 불교는 교조를 마른 똥막대기에 비유하는 귀여운 만행(?)을 저지르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