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것'을 둘러싼 남성들의 알 수 없는 집착에 관하여

입력
2023.09.16 04:30
24면
<134> '허구적 남성성'이 낳은 불안, 음경에 대한 집착으로

“남자라면 커야죠.”

교실에 웃음이 터진다. 남자 청소년과 함께 ‘남자다움’에 대한 고정관념을 이야기하며, 우리 사회에서 어떤 게 남자답다고 여겨지는지 물어보면 늘 빠지지 않고 큼직함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남자 성기 사이즈에 대한 이야기임이 분명하지만 나는 도리어 “그렇죠. 학생이라면 자고로 꿈과 배포가 커야죠”라고 능청을 부린다. 어디 그뿐일까, 성교육 시간에는 남자 평균 성기 사이즈에 대한 질문이 초등학교 때부터 빠지지 않고 나온다. 음경에 대한 집착은 비단 혈기왕성한 청소년의 전유물도 아니다.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해외 곳곳 관광지에서 남근 모형의 기념품, 술병, 심지어 조각상까지 찾아볼 수 있다. 그것이 전 세계에 퍼져 있는 남아선호사상을 다소 직관적으로 보여준다고 여길 수도 있고 다산과 풍요, 건강 등을 상징하는 토템이라 이야기되기도 한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아무래도 의미는 나중에 갖다 붙인 것 같다는 합리적 의심을 하게 된다. 직관적으로 생각해 봐도 그렇다. 다산과 풍요를 기원하는데 음순도 아니고 왜 하필 그토록 과장되게 거대한 음경 모양이 필요하다는 말인가? 이 집착은 대체 무엇일까?

남성들의 거대한 음경에 대한 거대한 집착

흥미롭게도 이 집착에 가장 큰 열성을 보이는 사람들은 바로 이성애자 남성이다. 다른 남성의 발기된 음경을 볼 기회가 많을 것 같지도 않은 이들이 대체 왜 그토록 음경에 집착하는지 알다가도 모르겠다. 하지만 실로 남성 집단 안에서 이 거대한 음경에 대한 선망은 가히 신화라 불러도 과장이 아니다. 단적으로 내가 경험한 남성 집단만 해도 마찬가지였다. 유난히 도드라지는 음경을 가진 친구는 그것을 드러내는 데 거침없었고 주변에서는 부러움 담은 시선 보내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예능이나 영화에서도 이를 소재로 한 장면이 적지 않다.

이쯤이면 음경에 대한 집착은 단지 성적인 기능에 대한 관심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른다. 당장 해부학적으로 보더라도 여성의 성감에 큰 부분을 차지하는 신경조직은 질 안쪽 깊은 곳이 아닌 질 입구 5~7cm 부근에 분포되어 있다. 따라서 성관계 시 음경의 크기, 특히 길이가 성관계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고 말하기 어렵다. 많은 설문조사에서도 이성애 여성의 성관계 만족도와 파트너의 음경 크기는 그다지 큰 상관이 없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와 관련한 몇 가지 사례를 소개하면, 영국 비뇨기 관련 학술 저널 BJU International (British Journal of Urology International)에는 남성 음경 평균 사이즈를 찾기 위해 무려 1만5,000개의 음경을 연구한 자료가 게재되어 있다. 이 자료 말미에는 이 평균에 대한 남성들의 집착을 꼬집듯, 이성애 남성과 여성 5만2,031명을 대상으로 한 인터넷 조사 결과, 여성의 85%가 파트너의 음경 크기에 만족한 반면, 남성의 경우 55%만이 자신의 음경 크기에 만족한 것으로 나타났음을 소개한다. 또 다른 연구로 미국 국립보건원(NIH) 산하 국립 의학도서관 NLM(National Library of Medicine)에 게재된 ‘오르가슴 빈도’ 관련 연구에 따르면 이성애자 남성은 친밀한 사람과의 성관계에서 거의 매번(95%) 오르가슴을 느낀다고 답했다. 반면 이성애자 여성은 65%뿐이었고, 이는 레즈비언 여성(86%)보다도 낮은 수치였다. 여성의 성적인 만족도에 음경 크기가 중요하다면 이런 수치가 나올 수 있을까? 그러니까 이러한 연구로 미루어 봤을 때, 애초 남성들의 거대한 음경 집착은 성관계, 특히 여성과의 성적인 관계 맺음과 상관없는 이상한 그들만의 리그가 되어 버렸다고 이야기할 수 있겠다.


음경에 투영된 남성성?

유명한 비뇨기과 전문의도 유튜브 방송에서 이와 비슷한 이야기를 했다. 음경 확대 수술을 하러 상담 온 사람들 중 일부는 단지 성관계에 문제가 있어서라기보다, 목욕탕에서 자신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은 마음에 찾아왔다는 것이다. ‘사우나 콤플렉스’라는 말까지 붙여서 이를 두고 고민하는 모습은 짠할 지경이다. 대체 신체 일부일 뿐인 음경에 왜 이토록 집착할까? 그것은 ‘자존심’, ‘자신감’이라는 말로 음경에 투영해 이야기하는 것의 실체가 실은 ‘남성성’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성별이 주로 성기를 통해 구분되고 드러난다고 여겨지기에 음경에 남성성을 투영하는 것을 자연스럽고 당연하게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여기서 이야기하는 ‘남성성’은 비단 생물학적으로 염색체가 ‘xy’로 구성되어 있음을 이야기하는 게 아니다. 우리 사회에서 남성의 역할을 수행할 것임을 약속하고 그 대가로 남성이라는 사회적인 위치를 승인받을 수 있음을 이야기한다. 그래서 단지 음경을 둘러싼 자연스러운 신체 현상을 설명할 때에도 더 ‘남성적’이라고 여겨지는 표현을 사용한다. 이를테면 발기를 ‘화났다’고 표현하거나 발기부전을 ‘고개 숙인 남성’으로 표현하듯 말이다. 하지만 음경에는 감정이 없고 고개 숙인 건 남성이 아닌 음경일 뿐이다. 그럼에도 많은 남성들이 이를 구분하지 않으며 음경이라는 내밀한 신체에 남성성을 투영한다.

젠더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발끈하는 남성들

‘딕픽(dick pic)’은 음경에 왜곡된 남성성을 투영할 때 만들어지는 참사를 보여준다. 딕픽은 말 그대로 남성들이 자신의 음경 사진을 찍는 것을 의미한다. 그 애착을 이해하기는 어려워도 세상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있으니까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한다. 문제는 이것을 개인소장하는 정도로 그치지 않고 타인에게 다짜고짜 보낸다는 것이다. 우리가 흔히 ‘바바리맨’이라고 부르는 여성을 대상으로 하는 노출 성폭력의 온라인 버전이다. 여성 인플루언서, 연예인, 일반인 할 것 없이 SNS, 게임, DM, 에어드롭 등 창구도 다양하게 이런 피해를 겪었다고 이야기한다. 상식적으로 이런 행동을 통해 호감을 살 수 있을 리 만무하다. 그런데 대체 왜? 싶은 이 행동의 저의에는 음경 사진을 통해 자신의 남성성을 과시하고 상대의 불쾌한 감정을 촉발하는 등 타인을 통제, 지배하고 있다고 믿고 싶은 그릇된 욕구가 숨어 있다.

몇 해 전, 우리 사회를 휩쓸었던 ‘집게손가락’을 둘러싼 광풍 역시 비슷한 문제를 보여준다. 남성들이 많이 사용하는 온라인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한 광고 포스터에 사용된 집게손가락 모양이 한국 남성의 작은 음경 사이즈를 조롱하기 위함이라는 음모론이 퍼졌다. 허술하기 그지없는 황당무계한 이야기에도 해당 기업과 디자이너를 향한 비난과 폭력은 스포츠처럼 번졌다. 이 광풍이 의아했던 건, 지금까지 온라인 공간에서 성적인 이야기, 특히 여성의 성기를 비롯한 신체 부위에 대한 말, 농담이라 이야기되는 폭력은 차고 넘쳤기 때문이다. 도리어 이에 대해 조금이라도 불편한 기색을 보일라 치면, ‘진지하게 굴지 말라’며 면박을 주기 일쑤였다. 그런데 왜 갑자기 남자의 음경을 둘러싼 이야기에는 없는 말까지 만들어가며 발끈해할까? 이것은 음경을 둘러싼 이야기가 단지 성기만이 아닌 남성성에 대한 이야기이자 그로부터 비롯된 젠더권력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즉 이 문제의 본질은 지배적인 가부장적 남성성이 저물어가는 시대에 여전히 그 미련의 끈을 놓지 못하고 젠더권력을 유지하고자 하는 시도의 일환이다.

음경은 음경일 뿐이다

음경은 그저 음경일 뿐이라서, 모양이 다르거나 손상을 입거나 기능을 잘 하지 못 해도 그로 인해 남성이 남성 아닌 존재가 되지 않으며 남성으로 살아가는 개인의 삶이 의심, 질타받을 필요도 없다. 도리어 남성성이라는 실체 없는 허상을 음경으로 환원하여 이야기할수록 모든 남성은 남성이기 위한 끊임없는 자격투쟁에 빠져들게 되고 더 많은 남성의 삶은 괴로워질 것이다. 우리는 이에 대해 단지 안쓰러워하거나 이로부터 탈피해 해방만을 외칠 게 아니라, 음경으로 환원되어 이야기되는 남성성이 얼마나 허구적이고 취약하며 부질없는지를 인정하고 이야기해야 한다. 나아가 남성성이 차지하고 있는 권력과 그 지배구조에 대한 변화를 모색해야 한다. 삐뚤어진 음경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물어보자.

남성을 남성이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또 무엇이어야 하는가?


편집자주

젠더 관점으로 역사와 문화를 읽습니다. '남성과 함께하는 페미니즘' 활동가인 이한 작가와 김신현경 서울여대 교양대학 교수가 번갈아 글을 씁니다.
이한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