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아이스크림 사 줄게요. 어떤 거 먹고 싶어요?"
취재진에게 아이스크림을 권한 레나 롤링스(64) 할머니는 경증 치매를 앓고 있다. 지갑에서 돈을 꺼낸 할머니는 꼼꼼히 계산해 정확히 값을 치렀다. 하지만 할머니가 가격을 틀려도, 돈을 내지 않아도, 터무니없이 많은 돈을 건네도 괜찮다. 이곳은 치매 환자들의 안전한 사회생활을 위해 조성된 도시 속의 도시, 덴마크 스벤보르시의 '브뤼후셋 치매마을'이기 때문이다.
한국일보가 지난달 16일 방문한 브뤼후셋 마을은 수도 코펜하겐에서 차량으로 2시간 거리에 있다. 브뤼후셋에는 원래 평범한 시립 요양원이 있었지만, 2014년 스벤보르시 공무원들이 네덜란드의 '호그벡 치매마을'을 견학한 뒤 전환점을 맞았다. 호그벡 마을 환자들이 치매 발병 이전과 비슷한 삶을 누리는 것을 보게 되자, 스벤보르에 돌아와 치매마을 조성에 착수한 것이다. 코뮌(지방정부)은 시립 요양원 17곳 가운데 브뤼후셋을 마을 형태로 전환하기로 하고, 인근 건물과 토지를 매입해 2016년 덴마크 최초이자 유일무이한 치매마을을 조성했다.
브뤼후셋 마을엔 지난달 기준 125명이 거주하고 있다. 원한다면 치매에 걸리지 않은 가족도 함께 입소할 수 있다. 마을 밖 치매 환자가 이용할 수 있는 주간보호센터도 함께 운영한다. 치매를 앓아도 안전하게 생활할 수 있도록 설계됐기 때문에 마을에는 식당, 도서관, 카페, 이발소, 마트 등 편의시설도 자리 잡고 있다. 일주일에 한 번 주간보호센터를 다니는 레나 할머니는 식당과 카페의 단골손님이다. 편의시설 운영은 자원봉사자가 맡고 있었다.
환자가 상점에서 비용을 잘못 지불하면 관리비를 통해 정산한다. 아이스크림 가게에서 자원봉사 중인 토브 오토는 "환자들이 계산하지 않고 나가도 다그치지 않고 자연스럽게 넘어간다"며 "거주자들이 불편함을 느끼거나 '내가 잘못했구나'라고 생각하지 않도록 하는 게 중요하다"고 설명했다. 아네트 소비 브뤼후셋 매니저는 "보호자는 환자가 좋아하는 물건을 치매마을로 보내 상점에 진열할 수 있고, 환자는 자연스럽게 자신이 좋아하는 물품을 구매하기도 한다"고 말했다.
거주 비용은 한 달에 5,350크로네(약 100만 원)로, 스벤보르 내의 다른 시립 요양원과 비슷하다. 식비와 주거비를 제외한 모든 돌봄 비용은 덴마크 정부가 부담한다. 소비 매니저는 “거주자들이 내는 비용은 덴마크 노인들이 받는 연금으로 충분히 지불 가능한 수준”이라고 설명했다.
마을 입소는 스벤보르시의 치매 상담기관이 결정한다. 소비 매니저는 “상담기관 3곳에서 증상을 진단한 뒤 입소 여부를 결정한다"며 "마을에서 직접 환자를 선발하진 않는다”고 말했다. 거주자 대부분은 스벤보르시 주민이고, 인근 지역의 치매 환자도 입소 가능하다.
브뤼후셋 마을 환자들은 원하면 언제든 마을 내부를 산책할 수 있다. 마을에 거주하는 헬가 엔슨(85) 할머니는 “점심 먹고 나서 산책하면서 정원에 있는 닭이랑 오리를 구경하는 게 일과”라며 “(마을) 밖에 살 때랑 다를 바 없이 자유롭다”고 말했다. 스스로 거동이 힘든 환자들은 자원봉사자와 함께 골프카트를 타고 마을 이곳저곳을 돌아다닌다. 안전 문제나 실종을 우려해 대부분 건물 내부에서 생활하는 한국의 돌봄시설과는 대비되는 부분이다.
치매마을은 외부와 단절된 공간이 아니다. 외부인 출입도 치매 환자의 외출도 자유롭다. 면회 시간이나 횟수 제한도 없다. 기자가 마을 입구에 도착했을 때도 아내를 보러 온 할아버지가 "안내해줄 테니 따라오라"며 환영했다. 마을에선 누구든지 자원봉사도 가능하다. 지난달에도 35명의 봉사자가 마을을 출입해 환자들의 산책이나 외출을 도왔다.
낮은 철조망 울타리가 있지만 마을 출입구를 잠가 두진 않는다. 출입구를 통해 치매 환자가 마을 밖으로 나갈 수 있지만, 정원 곳곳에서 산책을 돕는 자원봉사자들이 있기 때문에 쉽게 눈에 띈다. 소비 매니저는 "일부 거주자는 위치추적기(GPS)를 사용하지만, 거주자를 속박할 수 없다는 게 치매마을의 기본 정신"이라고 말했다.
배회 증상이 반복적으로 나타나면 회의와 상담을 통해 배회 욕구의 근원이 무엇인지 파악하려고 한다. 브뤼후셋의 철학은 "질병이 아니라 질병 뒤에 있는 사람을 보자"는 것이다. 거주자를 단순히 치매 환자로 치부하지 말고, 개개인의 특성을 존중하자는 의미다. 소비 매니저는 "환자마다 배회하는 나름의 사연과 이유가 있다"며 "그들의 행동이 잘못됐다고 지적하기보단 무슨 의도로, 어떤 의사를 전하고 싶었는지 알아내는 게 우리 역할"이라고 설명했다.
전문가들은 한국에서 브뤼후셋 같은 마을을 당장 만들긴 어렵지만, 브뤼후셋의 돌봄 철학은 참고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10년 넘게 치매 환자를 진료하고 있는 장기중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는 "배회 가능성을 차단하기 위해 치매 환자의 외출을 제한하는 건 궁극적인 해결책이 될 수 없다"며 "시간이 걸리더라도 치매 환자의 욕구와 불안을 해결하는 쪽으로 정책 초점을 맞춰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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