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아이들은 수많은 미디어에 노출됐잖아요. 그런데 굳이 학교에서까지 스마트기기를 이용해야 하나 싶어요."
서울 서대문구에서 중학교 1학년 아이를 키우는 강모(39)씨는 최근 학교에서 보낸 가정통신문을 보고 한숨을 쉬었다. 2학기부터 '디벗'이라는 이름의 태블릿PC를 지급한다는 내용이었다. 디벗은 '디지털'과 '벗'의 합성어인데, 서울시교육청에 따르면 삼성전자 갤럭시탭 S7 FE나 애플 아이패드 9세대 등 5종류 중 하나를 고를 수 있다고 한다.
안 그래도 자녀들 스마트폰 지도가 힘겨운 부모 입장에선, 디벗의 등장으로 통제해야 할 스마트기기가 하나 더 늘어난 셈. 강씨는 "학교에서 태블릿PC를 공짜로 나눠주면 아이가 스마트기기에 더 중독되지나 않을까 걱정이 크다"고 말했다.
서울시교육청이 "1인 1스마트기기 교육 환경을 조성하겠다"며 관내 모든 중1 학생에게 디벗 보급 사업을 이어가자, 학부모들의 걱정이 커지고 있다. 무료 배포되는 스마트기기는 모두 7만530대. 지난해 기준 총 600억 원의 교육예산이 투입된 사업이다.
인터넷 학부모 카페 등에선 중학생 자녀를 둔 부모들의 우려가 끊이지 않고 있다. 디지털 교과서 등 본래 목적으로 쓰이기보단 게임이나 동영상 시청 등에 오·남용될 가능성이 적지 않다는 걱정이다. 중2 아이를 둔 학부모 이모(42)씨는 "작년에 아이가 태블릿을 지급받았는데, 집에서 태블릿으로 유튜브와 게임만 했다"고 말했다. 학교 재량에 따라 디벗을 학교에 두지 않고 가정에서 보관하는 경우도 있어, 학교 바깥에서도 학생들의 디벗 의존도가 높아질 우려가 있다.
불필요한 애플리케이션(앱)이나 유해 동영상 차단 기능이 설치됐다지만 무용지물이 될 수도 있다. 학생들 사이에선 이미 '디벗으로 게임하는 방법' 등이 암암리에 공유되는 중이다. 실제로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 '디벗'을 검색하자 '학교 단말기 뚫어드립니다'라는 이름의 채팅방이 검색됐다. 이 채팅방에선 차단 시스템을 우회하는 방법이 소개됐다.
올해 세수 펑크(목표보다 덜 걷힌 세입)가 59조 원에 달한다는 전망이 나올 정도로 나라에 돈이 부족한 상황에서, 지방재정교육교부금을 등에 업은 초·중·고 예산만 넘치고 있다는 지적도 이어지고 있다. 학생 수가 감소하는 상황에서, 시·도교육청이 남는 교육예산을 선심성 사업에 낭비하고 있다는 얘기다. 지난해 말 서울시의회는 "디벗이 교육적으로 활용되지 않는 등 현장에서 부작용이 많다"며 예산 전액을 삭감했지만, 서울시교육청은 지난해 이월예산과 올해 1차 추가경정예산으로 552억 원을 확보해 2학기 디벗 보급에 나섰다. 황철규(성동4) 서울시의원은 “디지털 역량을 키운다는 명목하에 선심성 포퓰리즘 정책을 추진하고 있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전문가들은 "아동·청소년의 경우 과도한 스마트기기 노출이 부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으며 조기 디지털 교육이 가져올 역효과까지도 신중하게 고려해야 한다"고 경고한다. 홍후조 고려대 교육학과 교수는 "최소한 중학생 때까지는 디지털 학습보다는 (실물 교과서 등) 아날로그적 경험을 쌓을 필요가 있다"며 "지금 아이들은 디지털에 너무 많이 노출돼 정보처리가 안 되는 실정이라, 디지털 교육은 직업교육 등 필요한 부분에서만 제한적으로 사용돼야 한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