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건강의학과에 처음 오신 분과의 만남은 신체·신경학적 검사를 포함해 증상의 유무를 평가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이들 증상과 징후에 기반해 어떤 진단이 가능한지를 추정하고 그에 따라 가능한 치료법을 의논하는 것이다.
그런 뒤에는 해결해야 할 문제점 리스트를 정하고, 오래된 마음 속 고통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이를 다루고 살아나갈 수 있도록 마치 러닝 코치처럼 돕는 역할을 하는 것이 저자가 하는 일이다.
의사자격증을 딴 이후 전문의가 되기 위한 전공의 시절에는 상담한 내용을 교수님과 선배 의사 앞에서 발표하면서 혼나기도 하고, 비평과 논의의 과정을 거친다. 초심자 입장에서는 우울증이나 조울증, 조현병, 성격장애 진단이 겹치기도 하고 헷갈리는 경우가 많고, 한쪽 기준을 들이대면 그 진단으로만 보이기 쉽다.
의학 교과서에 기반한다 해도 그 단어를 받아들이는 기준이 사람마다 다르기 때문에 현재 호소하는 증상이 우울은 맞는 것인지 혹은 불안과 강박을 표현하는 것은 아닌지를 한 사람의 의견이 아닌 집단의 의견으로 확인하면서 의사 한 사람의 ‘주관적 전문성’을 미세 조정하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의사들은 이것을 흔히 ‘증례 세미나’ 또는 ‘집담회’라고 부르고, 전문의가 된 이후에도 수시로 다른 경험을 쌓은 동료들의 의견을 들어 전문의로서의 관점을 조정한다. 한 장의 자격증이 평생의 전문성을 담보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우리의 다양한 일상에도 이런 면이 아주 많다. 판사의 형사 판결에 대한 뉴스를 보면서 그게 상식에 맞나 의아해하기도 하고, 같은 사회 현상에 대해서 서로 아주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이 많다는 것을 느끼지 않은가?
국어사전에서는 상식(常識·Common Sense)을 ‘사람들이 보통 알고 있거나 알아야 하는 지식, 일반적 견문과 함께 이해력, 판단력, 사리 분별을 포함한다’고 정의한다. 즉, 상식이란 그 사회에 속하는 사람들 모두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기본적인 이해력과 판단력, 교양 수준을 말한다고 하겠다.
그런데 요즘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듣다 보면 과거 시대에 비해 일반적 상식이라는 것에 대한 의문이 자주 든다.
고대에서 중세를 거치는 동안 제사장과 종교 지도자, 정치적 지도자가 문화와 언론을 지배했고, 그래서 한 집단의 사람들이 듣고 경험하는 것들은 비슷할 수밖에 없었다. 상식이라는 것이 경험과 지식에 의존한다고 하면 다들 비슷한 생각에 동의하고 살았을 것이다.
구텐베르크 활자 혁명 이전만 해도 책이라는 것이 워낙 귀하고 구하기 힘들어 그렇지 마음만 먹으면 특정 분야의 책을 다 읽는 것도 가능했을 것이니까 말이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국민 공통 교육과정과 청소년세계문학전집이라는 이름으로 어린시절의 교양을 공유하는 또래가 많았고, 몇개 TV 채널에 탐닉하던 어른들은 아주 멀리서 어린시절을 보냈어도 마치 동네에서 자란 것처럼 공유하는 경험이 많았다.
현대는 어떤가? 학교 교육과 책이 사람들의 교양과 상식 수준을 좌우하기보다는 서로가 공급하는 다양한 채널의 소셜미디어와 영상에 영향을 받는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감정에 영향을 받아 마음 편한 논리를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결국 나 좋은 걸 지속적으로 강화하는 편향에 빠지기 마련이고, 결국 비슷한 생각을 하는 많은 소집단이 존재하는게 요즘의 모습이다. 누가 뭐래도 내 생각은 다르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우선 이 사회 속 교양인으로 살려고 한다면 본인 마음 가는 대로 생각하는 것을 상식으로 착각하지 말아야 한다. 기본적으로 사람마다 다른 생각을 가지고 산다고 인정하는게 차라리 맞을 것 같다.
그럼에도 사회를 안전하고 편안하게 발전시키고자 한다면 서로 다른 상식과 욕구를 조율할 수 있는 기본적 공통 분모로서의 ‘상식’이 무엇인지 고민해야 한다. 이를 다른 말로 규범과 제도라 할 것이고, 예의나 규칙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 판사나 정치인, 선생님 등 타인에게 중요한 영향을 주는 사람이라면 일을 맡기기 전에 마치 사격장에서 영점 조정하듯이 공통적으로 공유해야 하는 상식 수준을 맞추는 과정이 필수적일 것이다. 감정과 이익이 아니라 이성으로 조율된 판단 기준이 현대에 필요한 상식일 수도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