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년 전 바둑은 스포츠가 됐다. 2010 광저우 아시안게임 정식종목으로 채택됐고, 참가국 기사들은 3개의 금메달(남녀단체전·혼성페어)을 두고 진검 대국을 펼쳤다. 결과는 한국의 전 종목 ‘싹쓸이’. 이창호와 이세돌이라는 불세출의 거목을 둘이나 보유하고 있던 한국은 남자단체전 예선 6전 전승(결승 중국전 4-1승)을 거두며 압도적인 실력을 뽐냈고, 여자단체전(금메달)과 혼성페어(금·동메달)에서도 3개의 메달을 추가했다.
그 뒤 아시안게임에서 자취를 감췄던 바둑은 이번 달 개최되는 2022 항저우 아시안게임을 통해 정식 종목으로 복귀했다. 이번에도 금메달 3개(남녀단체전·남자 개인전)가 걸렸다. ‘바둑 3강’인 한·중·일의 자존심이 걸린 종목이기도 하다. 아시안게임 출전을 앞두고 있는 ‘바둑 여제’ 최정(27) 9단을 지난달 31일 서울 중구 플라자호텔에서 만났다.
“(여자 개인전이 없어서) 제가 아무리 잘해도 받을 수 있는 메달은 하나네요.”(웃음)
최정의 말에는 강한 자신감이 깔려 있었다. 생애 첫 국제종합스포츠대회 출전이라는 점이 전혀 신경 쓰이지 않는 눈치였다. 그는 “어쩌면 아직 대회까지 시간이 남아서 실감이 안 나는 것일 수도 있다”며 웃은 뒤 “팀원들과 열심히 준비하겠다”고 각오를 전했다.
그의 말투에 은근한 아쉬움도 묻어났다. 최정은 “여자 개인전이 없어서 아쉽다”며 “그래도 나라를 대표해 금메달에 도전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큰 영광”이라고 전했다. 여자 개인전이 존재했다면 어떤 성적을 거뒀을지 예상해 달라는 질문에는 “상대 선수들을 자극하면 안 된다”며 웃은 뒤 “금메달을 따려고 엄청 열심히 준비했을 것”이라는 말로 답변을 갈음했다.
그의 자신감에는 이유가 있다. 2010년 프로에 입단한 최정은 2018년 여성 기사로서는 최연소이자 최단기간에 9단으로 승단한 명실상부 현존 최고의 기사 중 한 명이다. 2012~16년 달성한 ‘여류명인전 5연패’를 포함해 올해 8월까지 누적 우승만 27회에 달한다. “광저우 아시안게임 성적이 좋았다고 해서 크게 부담을 느끼지 않는다”는 말이 허언이 아닌 셈이다.
그렇다 해도 단체전으로 진행되는 아시안게임은 혼자만의 힘으로 정상에 설 수 있는 대회가 아니다. 최정과 함께 대표팀에 합류한 오유진 9단·김채영 8단·김은지 6단이 모두 제 몫을 해줘야 한다. 이에 대해 최정은 “한국이 전혀 밀린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며 “몸 관리와 현지적응만 잘하면 좋은 결과를 낼 것”이라고 강조했다. 실제로 최근 오유진, 김채영, 김은지는 중국여자갑조리그에서 중국 대표팀인 우이밍 5단, 왕위보 4단 등을 꺾은 바 있다.
그중에서도 특히 김은지의 상승세가 무섭다. 2020년 입단한 김은지(16)는 매년 빠르게 성장해 올해 최정과 IBK기업은행배 여자바둑마스터스 결승(3번기)과 닥터지 여자 최고기사 결정전 결승(3번기)에서 연달아 맞붙게 됐다. 지난달 막을 내린 IBK기업은행배에서는 최정이 2-0으로 승리했지만, 2국 모두 초중반까지 김은지가 우세한 바둑을 두고 있었다. 닥터지 대회는 현재 양 기사가 1국씩을 가져간 상태로, 9일 3국에서 ‘신·구 대결’의 승자가 결정 난다. 최정은 “김은지 프로가 아직 어려서 그런지 실력이 느는 속도가 장난이 아니다”라며 “그만큼 아시안게임에서는 든든한 후배”라고 극찬했다.
단체전이라는 특수성 외에도 이번 대회에는 도핑과 ‘중국 룰(덤 7집 반)’이라는 변수가 존재한다. 지난달 11~15일 충북 진천국가대표선수촌에서 진행한 훈련과 강의는 다양한 변수를 줄이는 데 큰 도움이 됐다. 최정은 “금지약물 강의, 심리상담, 웨이트 트레이닝, 기술훈련 등을 했다”며 “특히 주로 개인전을 많이 치르는 바둑기사들이 다 함께 숙식하며 유대감을 올릴 수 있는 기회였다”고 밝혔다. 한국 룰(덤 6집 반)과 다른 규칙에 대해서는 “대표팀 선수들은 이미 국제무대 경험이 많다. 크게 걱정하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총 10개국이 참가 신청을 낸 항저우 아시안게임 바둑 경기는 24~28일 남자 개인전, 29일~10월 3일 남녀단체전 순으로 펼쳐진다. 최정은 “인공지능 보급 후 중국뿐 아니라 일본 기사들의 실력이 많이 올라왔다”면서도 “그래도 최근 기세는 내가 더 좋다. 나와 팀원들을 믿겠다”고 금메달을 향한 각오를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