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닥 내보내야 하나, 실험쥐 죽여야 하나… 과학자들 “모욕감 느낀다”

입력
2023.09.05 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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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D 예산 삭감, 과학계 약자에 불똥 튈라
여파 언제, 어디까지 이어질지 몰라 걱정
“연구비 경쟁 심화해 카르텔 공고해질 것”
“허술하게 관리한 관료들은 책임 안 지나”

지방 대학에서 일하는 한 이공계 교수는 곧 종료되는 연구과제의 후속 연구를 위한 예산을 정부에 최근 신청했는데 불가 통보를 받았다. 이유는 듣지 못했다. 물리학 분야 기초연구라 정부 연구개발(R&D) 예산을 받지 못하면 현실적으로 다음 단계를 지속하기 어렵다. 이 교수는 “하는 수 없이 박사후연구원을 내보내야 할 것 같다”고 한탄했다.

정부의 R&D 예산 대규모 삭감 계획에 과학기술계의 반발이 거세지는 가운데 4일 연구현장에서는 삭감에 따른 부작용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과학자들은 “일부 연구 부정 등을 이유로 연구자 전체를 모욕하는 것”이라며 “정부가 걷어내겠다는 R&D 이권 카르텔의 실체부터 명확히 하라”고 반발하고 있다.

“자부심 컸는데 카르텔 취급당해”

생명과학 분야의 한 연구자는 요즘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다. 실험용 쥐를 키우는 동물실 유지에 드는 비용이 연간 수억 원인데, 연구비가 삭감되면 감당하기 어렵다. 그렇다고 전원을 끄면 쥐들은 그대로 죽는다. 쥐를 살리려면 연구 주제를 축소해야 할 텐데, 그럼 인력을 줄여야 한다. 이 연구자는 “난치성 질병 원인을 밝히고 치료제 개발에 초석이 될 연구를 한다는 자부심이 컸는데, 갑자기 카르텔 취급을 하니 억울하다”고 호소했다.

지난달 22일 정부가 내년 R&D 예산을 올해보다 13.9%(3조4,000억 원)나 줄인 21조5,000억 원으로 책정하고, R&D 사업 평가에 상대평가를 도입해 하위 20%는 구조조정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그러자 많은 연구책임자들이 재료비를 줄일지 인건비를 줄일지 곧 결정을 내려야 하는 상황에 처했다. 온라인 이공계 커뮤니티에선 “가장 큰 피해를 보는 것은 비정규직 연구자들” “일부 학생들은 연구할 곳을 잃게 될 것”이라는 예상이 줄을 잇는다. 결국 카르텔 척결의 불똥이 박사후연구원이나 대학원생, 비정규직 같은 과학계 ‘약자’에게로 튈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국산 mRNA 백신 플랫폼을 개발하려고 지난해부터 2년간 344억 원을 투입해 호주와 르완다에서 임상시험을 진행하는 단계까지 온 한 연구사업단도 내년부턴 지원이 중단될 위기에 놓였다. 사업단에 참여 중인 한 연구자는 “정부 지원이 끊기면 임상시험을 포기한다는 기업도 나오고 있다”며 다음 감염병 대유행 때도 대응할 백신이 없으면 어떻게 하려는 건지 답답하다”고 토로했다.

정부는 비효율을 제거하면서 첨단 바이오와 우주 같은 미래전략기술에는 투자를 늘리겠다고 했지만, 현장에서 체감하는 삭감 범위는 분야를 가리지 않는다. 조승래 더불어민주당 의원실이 국가과학기술연구회로부터 제출받은 자료에 따르면 정부출연연구기관 중 예산이 가장 많이 감소한 곳은 바이오 분야인 한국생명공학연구원, 안전성평가연구소다. 우주 분야도 연구 성격에 따라 감액 폭이 다르다. 한국천문연구원은 주요사업비가 올해 대비 28.1%가량 감액된 반면, 한국항공우주연구원은 22.9%로 5%포인트 이상 차이 난다.

“도로 ‘줄 세우기’ 한다는 건가”

R&D 예산 감축의 여파는 적어도 내년까지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특히 예산 감축 규모가 20~30%로 가장 큰 출연연들은 쪼그라들 대로 쪼그라든 연구비를 기관 내에서 배분해야 하는 민감한 문제가 남아 있다. 전체 ‘파이’가 줄어든 만큼, 경쟁과 불만은 더욱 커질 수밖에 없다. 한 출연연 관계자는 "연구에 대한 평가가 효율성으로만 논할 수 없는 영역인데, 획일적으로 적용하다 보니 사기가 떨어지고 볼멘소리가 나올 것"이라고 걱정했다. 한 이공계 대학 교수는 “연구비 경쟁이 더 치열해지면서 심사 과정에서 카르텔이 오히려 더 공고해질 가능성이 있다”고도 지적했다.


상대평가 도입 예고에 대해서도 연구자들 사이에선 반발심이 높다. R&D 특성상 분야가 다양하고 내용도 복잡한 데다 의미 있는 성과를 판단하는 기준도 다른데, ‘줄 세우기’로 저성과자를 솎아내는 방식이 적절하냐는 것이다. 과학정책을 연구하는 한 교수는 “결국 논문 몇 편, 특허 몇 개 같은 단순하고 계량화한 잣대를 평가에 적용하게 될 가능성이 있다”고 예상했다. 과학계가 지양하는 과거의 평가 방식으로 되돌아가는 것 아니냐는 우려다.

과학자 입장에선 ‘연구 생명’이 걸린 문제일 수 있는데, 예산 삭감이 너무 갑작스럽게 진행됐다는 점도 과학계의 반발을 불렀다. 지난 6월 과학기술정보통신부가 준비했던 예산안에 대해 윤석열 대통령이 같은 달 말 국가재정전략회의에서 “나눠먹기식, 갈라먹기식 R&D는 제로 베이스에서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공개 지적하면서 예산안이 전면 재검토됐고, 두 달 만에 대규모 삭감이 결정됐기 때문이다.

과기정통부 관계자는 “연구비가 삭감되는 개별 사례 모두가 R&D 효율화 조치는 아니다”라며 “지원한 부처의 자체 결정, 선행 사업 성과 부진, 정책적 우선순위 등에 따라 후속 사업을 중단한 경우도 있다”고 설명했다. 과기정통부 이종호 장관과 주영창 과학기술혁신본부장이 직접 현장 연구자들을 만나 의견을 듣겠다며 진화에도 나섰지만, 연구 현장의 반발은 식지 않고 있다. 출연연의 한 연구자는 “나눠먹기, 카르텔이 생길 만큼 연구비를 퍼주고 허술하게 관리한 관료들은 왜 책임지지 않나”라고 되물었다.

이날 국회에서 열린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회 전체회의에서도 R&D 예산 삭감을 둘러싼 진통은 이어졌다. 더불어민주당은 “대통령 한마디에 R&D 예산 핵폭탄을 터뜨렸다”며 날을 세웠고, 국민의힘은 “선택과 집중을 하는 전략적 예산 배분을 해야 하는 시점”이라고 맞받았다. 좀처럼 문제 해결의 실마리가 보이지 않는 가운데, 과학기술 단체들이 5일로 예고한 R&D 예산 삭감 공론화 기자회견에 이목이 쏠리고 있다.

임소형 과학전문기자 precare@hankookilbo.com
오지혜 기자 5g@hankookilbo.com
이현주 기자 memory@hankookilbo.com
문예찬 인턴기자 moonpraise@ewhain.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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