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민경 작가의 에세이 '등고선 없는 지도를 쥐고'를 읽은 것은 (늘 그렇듯) 글이 잘 안 풀리는 어느 밤이었다. 책은 표지부터 내용까지 모두 나의 취향을 저격했는데, 내가 특히 좋아하게 된 부분은 목차다. ‘내 친구가 좋아해줄 이야기’라는 1부 제목은 보면 볼수록 좋다.
가끔 글을 쓸 때 그런 기분이 든다. 여럿이 모인 자리에서 모두가 각자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나도 끼어들어야 하는 것 같은. 괜찮은 타이밍을 노려야 한다. 분위기와 대화 주제가 어울리는지 골라야 하고 누군가의 말을 끊지 않지만 그 말이 끝날 무렵 내 이야기가 자연스레 이어지도록 한다. 완벽한 타이밍이라 생각한 순간, 나는 입을 연다. 그리고 아무도 내 이야기를 듣지 않는다는 걸 깨닫는다. 사람들은 저마다의 이야기를 하느라 바쁘다. 결국 나는 이야기를 끝맺지 못하고 조용히 입을 닫는다.
이런 때 나에게 있어 해결 방안은 두 가지다. 하나는 중도 포기(우울해져 방바닥만 긁게 되므로 추천하지 않는 방법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믿을 만한 친구들에게 지금 쓰고 있는 글 중에 제일 괜찮은 것 같은 부분을 메시지로 보내는 것이다. 하지만 새벽에 소설의 일부를 피드백받는 일은 드물다. 어쩐지 외로워져 주변에 있는 책을 펼쳐드는 순간. 나는 나의 오랜 친구가 책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등고선 없는 지도를 쥐고'를 펼친 밤, 나는 마감도 잊고 킬킬대며 웃으며 앉은자리에서 책을 다 읽었다. 책에는 정말로 친구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들이 쓰여있었다. 아예 작가의 실제 친구인 ‘최민이 재밌어할 이야기’도 번호를 달고 목차에 늘어서 있다. 작가는 친구 최민이 좋아할 만한 소설을 써보기도 하는데, 최민이 좋아하는 밴드와 최민을 엮은 이른바 팬픽소설이다. 그 외에도 남편인 ‘효’와 등고선이 없는 지도를 보고 무작정 걷다가 산길을 오른다거나, 어린 시절 크리스마스에 대한 기억을 나눈다거나 하는 시시콜콜한 이야기들이 실려 있다. 책을 다 읽고 나니 작가의 친구 최민이 부러웠다. 동시에 그 이야기들을 내가 엿볼 수 있게 권민경이라는 사람이 무사히 작가가 되어 다행이라는 생각도 했다.
여럿이 있는 자리에서 내가 말을 멈췄을 때 문득 한 명이 계속하라는 사인을 보낼 때가 있다. 자신이 듣고 있노라고. 그럼 그 한 명을 보고 이야기를 이어나갈 수 있다. 어느 순간 몇몇 사람들도 내 이야기를 듣는다. 그럼 나는 무사히 이야기를 마칠 수 있다. 모든 게 나를 기다려주는 단 한 명으로 시작된다.
아무도 내 이야기를 들어주지 않는 것 같은 밤, '등고선 없는 지도를 쥐고'는 내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어떤 책은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이 아니라 이야기를 들어주기도 한다는 걸 나는 알게 되었다. 이 글은 그러니까 '등고선 없는 지도를 쥐고'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 좋아할진 모르겠지만 어쨌든 고백해본다. 그 밤, 정말 고마웠다고. 덕분에 힘내서 이야기를 마칠 수 있었다고. 그러니 이 책이 더 많은 사람들을 만나서 그들의 친구가 되었으면, 권민경 작가에게 독자라는 많은 친구들이 생겨서 더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었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