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소비’는 다른 이들의 ‘고통’이다.”
지난달 중순 스페인의 휴양지 이비사섬. 기후운동단체 ‘멸종저항’은 페인트로 엉망이 된 3억 달러(약 4,000억 원)짜리 요트 앞에서 이같이 외쳤다. 요트 소유주인 미국 대형 유통업체 월마트의 상속인 낸시 월턴 로리를 향한 구호였다. 물 위에 가만히 떠 있을 때조차 연료가 드는 고급 요트가 지구 환경에 끼치는 악영향은 어마어마하다. 300척의 연간 탄소 배출량이 한 국가의 배출량과 맞먹는다는 연구가 있을 정도다.
AP통신은 28일(현지시간) 멸종저항의 사례처럼 점점 더 과격해지는 기후 운동의 대상이 종전 석유·가스 등 화석연료 기업에서 이제는 부자 개개인으로 옮겨가고 있다고 보도했다. 이 단체는 앞서 스페인 이비사 공항의 개인 제트기에도 스프레이를 뿌리고, 폭염이나 가뭄에도 아랑곳없이 물을 쓰는 골프장의 홀을 메워 버렸다.
다른 나라 사정도 다르지 않다. 미국에서는 같은 달 기후 활동가 40명이 억만장자들의 전용기가 이·착륙하는 뉴욕주 이스트햄프턴 공항의 진입로를 막아섰다. 이들은 부호의 별장이 몰린 햄프턴에서 “1%가 인류의 미래를 훔치고 있다”며 부유세를 요구하는 시위도 벌였다. 시위대에는 월트 디즈니의 손녀이자 영화 제작자인 아비게일 디즈니도 있었다. 그는 “전용기를 타면서 기후를 이야기하는 건 위선”이라고 기후전문매체 ‘인사이드 클라이밋 뉴스’에 말했다.
또 올해 5월 스위스 제네바의 개인 제트기 박람회에서는 활동가 100명이 자신의 몸을 항공기와 전시장 입구 등에 묶는 방법으로 행사를 방해했다. 명소나 예술 작품에 던지던 환경단체의 토마토가 이제 ‘슈퍼 리치’를 향하면서, 기후 운동은 이제 계급투쟁 성격마저 띠게 되는 모양새다. 멸종저항의 활동가는 “부유한 소수의 과잉 소비가 기후 위기를 부채질하고, 그 대가는 고스란히 빈자가 떠안는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실제로 기후 위기와 ‘부(富)’를 연관 짓는 움직임에는 근거가 있다. 세계 불평등 연구소에 따르면 소득 상위 10%가 전 세계 탄소 배출량의 절반에 책임이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특히 최상위 1% 부자의 탄소 배출량은 하위 50%의 두 배가 넘는다.
구체적으로 들여다보면, 지난해 유럽 민간 항공기들이 내뿜은 300만 톤 이상의 탄소는 유럽연합(EU) 거주자 50만 명의 연간 배출량을 넘어선다(그린피스 집계). 헬리콥터 이·착륙대, 수영장 등을 갖춘 요트는 연간 약 7,020톤의 탄소를 배출한다. 억만장자의 탄소 배출을 연구한 리처드 윌크 미국 인디애나대 교수는 “부자들의 호화 여행이 탄소 배출의 진짜 범인”이라고 AP에 꼬집었다.
다만, 고급 요트나 전용기 등에 대한 비판이 기후 위기 대응엔 실질적 도움이 되지 않는 ‘노이즈 마케팅’에 지나지 않는다는 지적도 나온다. 미 펜실베이니아주립대의 마이클 만 교수는 “사람들의 관심이 전체 탄소 배출량의 70% 이상을 차지하는 화석 연료 대기업들에서 개인들로 옮겨가고, 관련 규제에서도 시선을 돌리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고 경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