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노 사회의 시대다. 최근 잇따른 흉기난동 사건의 심리 밑바닥에는 타인 혹은 사회에 대한 분노와 자신에 대한 절망이라는 감정이 공통적으로 깔려 있다. 서울 관악구 신림동에서 흉기난동 사건을 벌인 피의자 조선(33)은 "열심히 살아도 안 되더라, 남들도 불행하게 만들고 싶었다"는 변명을 했다. 경기 성남시 분당구 서현역 흉기난동 사건 피의자 최원종(22)은 "사람을 죽여서 경찰의 관심을 끌고 싶었다"고 경찰에 진술했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한 직장인은 온라인 커뮤니티 '블라인드'에 대한 자신의 요청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불만을 품고 경찰관을 사칭해 살인예고 글을 올리기도 했다. 광주광역시의 한 20대는 지하철 바닥에 침을 뱉었다고 나무라는 역장에게 앙심을 품고 흉기를 휘둘렀다. 서울 은평구에서 흉기난동을 벌인 피의자는 "주변에 사람이 없다는 게 속상해" 흉기를 들었다고 했다. 다행히 은평구와 광주에서 다친 사람은 없었지만 피의자들은 긴급 출동한 경찰과 실랑이 끝에 현행범으로 체포됐다.
이렇듯 대한민국 사회 전체가 분노와 불안에 신음하고 있다. 흉기 소지 등 각종 오인 신고와 대피 소동도 이어지고 있다. 정부는 강력한 대응을 예고했고, 지자체들은 호신술 교육, 호신용품 제공 등 대책을 내놓고 있다. 하지만 불특정 다수를 향한 범죄에 대한 우리 주변의 공포는 쉽게 가라앉지 못하고 있다.
[에코의 마음청소]는 지난달 25일 오후 정정엽 대한신경정신의학회 미래전략특임이사를 만나 사회 전반의 분노와 불안 현상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다.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인 정 이사는 2015년 의사들이 직접 기사를 작성하는 인터넷매체인 '정신의학신문'을 공동 창간한 바 있다.
정 이사는 "사회적 분위기가 분노로 묶인다고 하더라도 공격의 의도성은 다 다르기 때문에 우선 △범죄자들의 피해망상 △일반 시민이 느끼는 분노 △사이코패스 모두 다 분리해서 바라봐야 한다"고 말했다.
정 이사는 분노가 범죄로 이어지는 메커니즘에 대해 설명했다. 그는 "생물학적으로 두뇌에서 '내가 이런 행동을 저질렀을 때 내가 무엇을 잃을지, 피해자가 아플지, 주변인들이 어떻게 생각할지' 등을 떠오르게 하고, 그럴 때 분노도 제어하게 된다"고 전했다.
그렇다면 피해의식이나 망상이 범죄로 이어지는 심리적 메커니즘은 뭘까.
정 이사는 "그런 사람들은 대개 '전쟁'과 같은 개념이 내재해 있는 경우가 많다"며 "그들의 주관적인 세상에서는 '나는 고립돼 있고 여기서 내가 남을 죽이지 않으면 남이 날 죽일 수 있다'는 사고가 박혀 있다"고 설명했다.
테러범들에게 '내가 이걸 저지르면 천국을 갈 수 있다'는 논리가 통하지 않는 잘못된 신념이 깔린 이유다. 그는 "이런 사람들에게는 어떤 근거를 대도 자신을 해한다는 믿음이 있다"고 덧붙였다.
정 이사에게 이런 분노나 피해의식이 조현병으로도 이어질 수 있는지 물었다. 그는 "조현병은 스트레스만으로 생기지 않는다. 생물학적, 심리학적, 사회학적 요인이 결합했다"며 "특히나 조현병의 경우 유전적인 요인이 강한데, 만약 부모 모두 조현병을 갖고 있다면 자녀의 발병률은 50%에 달한다"고 전했다.
그는 "조현병 환자 중 발병한 지 1년도 안 됐는데 범죄 같은 행위를 하는 사람은 없다"며 "대부분 발병한 지 오래됐는데 치료를 미루다가 심각해진 것"이라고 설명했다. 실제로 조현병 환자들의 범죄율은 일반인보다 5분의 1 수준으로 낮지만 중범죄 비율은 높다. 치료를 받지 않고 방치하다 보니 범죄의 심각도가 높아지는 셈이다.
'은둔형 외톨이'가 왜곡된 분노로 범죄를 저지르는 현상과 관련해서는 "인생에서 한번 삐끗하게 되면 한 단계 더 숨어들어 갈 수 있다. 계속 숨게 되면 당사자는 자기 나름대로 상황을 해석하게 된다"며 "분노의 감정을 그렇게 눌러 담다가 사건을 촉발한 사람과 주변인으로 분노가 확장되면서 '어차피 내 인생 끝났으니 저지르자'는 식으로 가버리게 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정 이사는 우리 사회 전반에 쌓인 분노조절 현상에 대해서도 설명했다. 그는 "사회적으로 소외당하고 개인적인 트라우마가 있다면 분노가 쌓일 확률이 높다"며 "보통 이런 사람들은 분노를 느낄 때 곧바로 대응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1, 2만큼의 분노를 받았을 때, 다른 사람들한테 받은 5, 6, 7 정도의 화풀이를 하는 경우가 생기는 이유다.
이런 문제에 대해 그는 "개인적으로는 분노를 수치화하는 연습도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살인예고글'과 관련해서 정 이사는 "글을 게시해 주목받고 쾌감을 느끼는 사람들도 있지만, 자신의 감정을 다루는 데 미숙한 사람들일 가능성도 높다"며 "분노나 불만을 세련되게 표현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올리지 않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그는 "이것을 올릴 때만 해도 처벌받을 수 있다는 생각 자체를 못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시민들이 겪는 불안과 트라우마에 대해선 "사회적 불안은 대부분 '예기치 못했다는 점'에 있을 것"이라고 정 이사는 분석했다.
근본적으로는 사회적으로 자기와 타인을 바라보는 시선 자체의 변화가 필요하다고 정 전문의는 전했다.
그는 "만약 '정신과 전문의 정정엽'이라고 하면 보통 직업·학벌·재력 등을 나타내는 요소인 '정신과 전문의'에 집중한다"며 "하지만 어떤 한 개인을 나타내는 본질은 후자에 있고, 후자를 볼 줄 알게 되면 타인에 대한 존중이 가능해진다"고 전했다.
마지막으로 그는 다양한 사회적 가치 존중을 통해 실패를 경험하는 이들이 다시 일어서는 발판을 마련해야 한다고 조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