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9월 김명수 대법원장이 취임할 당시를 돌이켜 보자. 당시는 대법원이 판결을 미끼로 행정·입법부에 로비를 시도했다는 '사법농단' 의혹이 사법부를 덮친 때였다. 사법부 독립이 가장 중요한 때였다. 그래서 김 대법원장은 '사법행정의 관리자'이자 '국회·청와대와의 소통 창구' 였던 대법원 법원행정처의 기능을 대폭 축소하고, 관료적 인사제도를 손질하는 등 다양한 처방을 꺼내들었다.
그렇게 6년이 흐르고 김 대법원장이 법복을 벗어야 할 때가 왔다. 그러나 임기 종료를 한 달 앞둔 지금 '김명수표 사법개혁'에 대한 평가는 박하기만 하다. 새로운 시도들이 각종 부작용을 일으키고, 법원에 대한 국민들의 신뢰가 갈수록 떨어지면서, 도대체 김 대법원장이 말하던 '개혁'의 진의가 무엇이었는지 의심을 받는 처지까지 내몰렸다.
취임사에서 김 대법원장은 '좋은 재판'을 전면에 내세웠다. 그가 말한 좋은 재판이란 "법과 양심에 따른 재판"이자 "절차와 결과 모두에 수긍하고 감동할 수 있는 충실한 재판"이었다. 그러다 보니 과거 '양승태 사법부'의 재판은 속도와 건수에 치우친 '성과 중심 재판'으로 규정됐다. 법원장이 부장판사를 닦달하고, 부장판사가 배석판사를 옥죄는 환경에서 좋은 재판을 달성할 수 없다는 진단이었다.
그러나 속도를 등한시하자 '재판 지연'이라는 괴물이 출현했다. 29일 사법연감 등에 따르면 1심 심리 기간이 2년을 넘어선 장기미제 건수는 김 대법원장 취임 4년여 만에 민사합의사건에서 약 2배, 형사합의사건에서 약 1.8배 늘었다. 특히 민사 1심 합의사건 처리기간은 2017년 294일에서 2021년엔 369일로 늘었다. 1심 재판만 1년이 넘게 가는 이런 현상을 두고 이형근 특허법원 고법판사는 "오래되고 어려운 사건은 미루는, 재판의 실패가 발생했다"(언론 기고)고 지적하기도 했다.
재판 지연의 원인은 다양할 것이다. 그러나 김명수 대법원은 유독 '외부 요인'을 강조했다. 법원행정처는 감염병 사태로 기일이 늦춰지면서 재판 진행이 더뎌졌다고 설명했다. 실제 코로나19가 사그라들고 재판 관할이 변동되면서 민사 1심 합의 기준 미제 건수는 2021년 4만7,000여건에서 지난해 3만7,000여건으로 완화되기 시작했다. 이에 더해 법원은 '판결문 쪽수 증가'를 근거로 어려운 사건이 늘었다는 점을 부각하기도 했다.
그러나 고참 법관들의 생각은 전혀 다르다. 이들은 재판 지연의 근본 원인이 김 대법원장이 추진한 '인사 제도 개편'에 있다고 봤다. 특히 판사들간 위계 타파를 위해 고법 부장판사(차관급) 승진제를 폐지하면서 열심히 일할 동기가 사라졌다고 말한다. 또 민주적 리더십을 위해 도입한 법원장 후보 추천제(일선 판사들이 후보를 추천하면 대법원장이 최종 임명하는 것)는 '법원 내 인기투표'로 전락하며 정당한 업무 지시마저 위축시켰다는 비판을 받는다. 법관의 헌신보다 일과 삶의 균형(워라밸)을 중시하는 조직 문화가 자리잡으면서 재판을 신속하게 할 유인 자체가 사라졌다는 것이다.
이처럼 현상의 원인에 대한 진단부터 서로 달랐음에도, 김 대법원장 임기 내 허심탄회한 논의의 장은 한 번도 마련되지 못했다. 수도권의 한 고법 부장판사는 "재판 지연의 원인 지목은 각기 다를 수 있지만, 문제는 (김명수 사법부의) 법원행정처가 이런 생각 차이를 방치했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6년 전 김 대법원장 취임사에서 무엇보다 강조된 건 정치의 개입으로부터 독립해 신뢰받는 사법부를 만들겠다는 다짐이었다. 그러나 이는 2021년 2월 불거진 김 대법원장 본인의 '거짓말 논란'으로 무색해졌다. 그간의 주장과 달리 그가 2020년 5월 사법농단에 연루된 임성근 전 부장판사의 사표 수리를 거부하면서, "(탄핵 등) 정치적인 상황도 살펴야 되고" 등의 발언을 한 사실이 녹취를 통해 드러난 것이다. 결국 김 대법원장은 이 사건으로 검찰 수사 대상이 됐고 "사법부 불신을 자초했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었다.
내부 통제도 부실했다. '통제하려 하지 않는' 행정처는 법관들의 편향성이 문제되는 상황을 사실상 방치했다는 평가마저 받는다. 정진석 국민의힘 의원에게 명예훼손 혐의로 이례적 실형을 선고한 박병곤 판사가 과거 사회관계망서비스에 정치적 견해를 밝힌 사실이 알려지자, 법조계 안팎에선 "법관 독립을 넘어선 방종"이라는 지적까지 나왔다.
외부로부터의 공격도 적극적으로 방어하지 못했다. 대선과 총선을 거치면서 사법부를 자당에 유리한 쪽으로 이용하려는 정치권의 무분별한 공격이 이어졌고, 대통령 등의 인사권 침해가 잇따랐음에도, 제대로 된 반발 한 번 없이 무력하게 당하기만 했다는 자조가 나왔다.
국민들이 법조계에 바라는 가장 큰 숙원 중 하나인 전관예우 문제도 미완으로 남았다. 김 대법원장은 취임사에서 "전관예우 문제에서 수준 높은 윤리기준을 정립하겠다"고 강조했고, 이후 법원행정처는 '전관예우 우려 근절 및 법관윤리 책임성 강화'를 사법개혁 4대 과제 중 최우선 숙제로 내세우며 8가지 입법 항목을 추진했다.
그러나 현재 이중 일부라도 시행되고 있는 제도는 원로법관제와 연고관계 진술의무 두 가지 뿐이었다. 퇴직 법관의 수임 범위와 기간 제한, 법조윤리협의회 기능 확대 등을 다룬 나머지 6개는 모두 입법 대기 혹은 검토 단계인 것으로 확인됐다.
게다가 전관 변호사 배출은 어느 때보다 늘었다. 고법부장 승진제가 폐지된 2020년 이후 현재까지 자의로 퇴직한 법관들은 총 293명으로, 이는 양 전 대법원장 임기 마지막 4년간 퇴직한 법관(211명) 수보다 82명이 더 많다. 대법원 재판연구관 출신의 한 변호사는 "전관예우 문제는 6년 임기 한 번으로 해결하긴 어려운 게 사실"이라면서도 "국회 논의를 가속화할 방법을 더 적극적으로 강구해보지 않은 것은 아쉽다"고 평가했다.
그의 6년 임기를 둘러싼 시민사회의 평가도 곱지만은 않다. '사법행정의 개방성과 투명성'을 높이기보단, 국민의 공감이 낮은 '내부 개편'에만 치중했다는 이유다. 김태일 참여연대 사법감시센터 팀장은 "내부 불만이 필연적인 인사 제도에만 신경쓰다가 정작 '열린 사법부' 만들기에는 실패했다"며 "그나마 판결문 공개 확대가 유의미한 성과"라고 말했다.
사법 이슈가 있을 때마다 훈령이나 의견서 수준에서 그쳤던 대법원의 '소심한 태도'를 아쉬워하는 목소리도 있었다. 입법으로 못박아둔 변화가 거의 없어 후임 대법원장의 성향에 좌지우지될 우려가 크다는 것이다. 김태일 팀장은 "김 대법원장은 법원조직법상 투명한 구조가 담보되는 사법정책자문위원회 대신, 훈령으로 별도의 사법행정자문회의를 운영했다"며 "왜 이런 방식을 채택했는지 잘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이라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