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력 일삼던 아빠, 툭하면 연락해 '효도' 강요...이제는 벗어나고 싶어요

입력
2023.08.28 04:30
24면

편집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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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결혼한 지 얼마 안 된 주부입니다. 그런데 친정, 특히 아빠에게 벗어나지 못해 마음이 괴롭습니다. 아빠가 자주 연락을 하고 여러 가지 요구를 해 부담을 느낍니다. 어린 시절부터 집안의 독재자였던 아빠에게 받은 상처가 커서, 이제는 거리를 두고 싶지만 제가 피하면 다른 가족들이 힘들어 할까 봐 걱정이 됩니다.

아빠는 굉장히 무서운 분이었어요. 제가 기억하는 아빠는 시도 때도 없이 화를 내는 불같은 사람이었습니다. 본인이 맘에 안 드는 일이라도 생기면 맨 정신으로 침착하게 말하지 못하고 술의 힘을 빌려 가족들에게 폭력과 폭언을 퍼부었습니다. 아버지가 술을 마시느라 귀가가 늦어지면 밤에 온 가족이 벌벌 떨 정도였습니다.

자기주장은 감당이 안 될 만큼 강한 분이었습니다. 제가 듣는 음악이나, 헤어스타일, 옷, 음식 등에 대해 늘 부정적으로 평가했습니다. 제가 피아노를 배우고 싶다고 했을 때 돈이 되는 기술을 배워야지 왜 돈이 안 되는 음악을 배우냐고 꾸짖었습니다. 저에게 피아노를 쳐보라고 해서 연주하다 틀리기라도 하면 "헛배웠다", "평생 세 곡만 완벽하게 연주할 수 있으면 된다"고 못 박았습니다. 다른 가족에게도 독재자처럼 행동했습니다. 외식을 할 때는 먹고 싶은 메뉴를 말해보라고 하면서도 이것저것 제안하더라도 결국 본인이 먹고 싶은 것으로 정합니다.

아빠는 특히 식사에 예민했습니다. 엄마가 밥을 잘 해줄 것 같아 결혼했는데 제대로 된 대접을 받지 못했다고 불만을 달고 살았어요. 주변 사람들에게도 엄마가 살림도, 요리도 제대로 하지 않는다고 험담을 자주 했습니다. 엄마가 외출 전 식탁에 음식을 차려놓고 가면 본인이 반찬 뚜껑을 열어서 먹는 것조차 기분 나빠했죠. 혼자 식탁에 앉아서 먹는 것도 싫어해서 밥을 다 먹은 제가 식사하시는 동안 앉아있을 때도 많았습니다. 퇴근시간이 일정하지 않았던 아빠는 갑자기 전화해서 저녁 먹으러 가자고 했는데 이미 밥을 먹었다고 해도, 아무리 배가 불러도 아버지와 또 밥을 먹어야 했습니다.

엄마는 늘 힘이 없었어요. 주부지만 주말에는 교회에 가느라 바빴고 평일에는 봉사활동을 하느라 저녁 늦게 들어왔습니다. 어릴 때 배고픔을 참으며 엄마를 기다렸던 기억이 많습니다. 엄마는 종교 활동이 가장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분이었지만, 아빠는 밥도 제대로 안 차리고 교회에서 시간을 보내는 엄마를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엄마 역시 아빠의 폭력과 폭언에 힘들어 했어요.

두 분은 결국 별거를 하게 됐어요. 엄마는 자신의 삶을 시작했지만 아빠는 홀로 지내시는 외로움을 크게 느끼는 것 같습니다. 저와 오빠, 남동생에게 자주 연락을 하거든요. 느닷없이 전화해서 밥을 먹자고 한다거나 집으로 불러들입니다. 최근에 아빠의 연락을 받고 가서 집에서 식사를 하는데 배가 불러 거절하자 아빠는 오늘 다 먹어야 한다며 입에 직접 넣어주기까지 했습니다. 순간, 제 어린 시절이 생각났어요. 그때도 지금도 아빠의 기분에 맞춰 억지로 먹는 제가 너무 무기력하게 느껴졌습니다. 남들에게도 거절을 잘 못하고 상대가 싫어할 것 같은 생각은 솔직하게 표현하지 못합니다.

평소에도 '효도'를 강조하는 아빠는 만날 때마다 숙제를 줍니다. 텐트를 사려고 하는데 알아봐달라거나 여행을 가고 싶으니 알아봐달라는 식이에요. 잘 알아보려면 상당한 시간과 에너지를 써야 해서 늘 버거워요. 연락이 오지 않는 날도 마음이 편치 않아요. 아빠가 아무도 자기에게 연락을 안 해서 화가 나있는 것이 아닌지 걱정이 됩니다. 아버지의 생일이면 선물과 카드를 준비하고, 식사 대접을 해드리는데 사랑이라기보다는 "이것밖에 준비 못했냐"는 꾸지람을 들을까 봐 걱정되는 마음으로 준비합니다.

아빠를 생각하면 '밑 빠진 독'이 떠오릅니다. 기준선이 높아서 그런지 늘 기대에 미치지 못한 기분입니다. 열심히 공부해서 좋은 학교에 진학했지만 학창시절 내내 칭찬 한번 제대로 들은 적이 없어요. 아버지는 본인 기준에 가장 똑똑했던 동생만 예뻐하셨어요. 그런 아빠를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지만 거절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아빠가 외롭지 않으면서도 제 마음이 편안할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요. 임신을 해서 가정에 집중하고 싶다가도 오히려 아빠가 집에 자주 찾아와 제 아이에게 저에게 했던 행동을 할까 봐 겁이 나요. 환경을 바꾸고 싶어 이민까지 생각하고 있어요. 어떻게 하면 아빠에게서 벗어나 마음의 짐을 벗을 수 있을까요.

김아영(가명·34·주부)

아영씨, 긴 사연을 읽으면서 당신이 얼마나 섬세한 사람인지 그려졌습니다. 어렸을 적부터 당신은 타인의 감정을 예민하게 느끼고, 상대방을 배려하는 사람이었을 것 같아요. 자신보다 타인의 입장을 먼저 배려하다 보니 자기주장을 잘 하지 못하고 속으로 앓는 경우도 많았을 거예요.

그런데 당신의 아버지는 반대였을 것 같습니다. 통제적이고, 주장이 강한 사람이었을 거예요. 상대에게 바라는 기준이 높고, 감정기복이 심하고, 까다로운 유형의 사람이죠. 그런 아버지는 당신을 이해하지 못했을 겁니다. 부모는 자식이 태어나면 아이의 특성에 맞게 양육을 해야 하지만 당신의 아버지는 그런 유형의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자식의 특성이 아니라 본인의 특성에 맞춰 무섭게 아이를 지배했죠. 어린 아영씨는 자신에게 집중하기보다 늘 아버지의 기준과 틀에 맞춰 살아왔죠. 독립한 아영씨를 마음대로 부르고 억지로 음식을 먹도록 하는 것은 아버지의 강압적이고 통제적인 태도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예요.

그와 상관없이 아영씨는 아버지의 사랑과 관심을 갈구했을 거예요. 추측건대 어린 아영씨는 아버지의 기대치에 맞추기 위해 모범적이고 성실하게 생활했고 주변에서 인정도 받았을 거예요. 하지만 아버지의 인정을 받기가 쉽지 않았죠. 자녀를 키울 때 무언가 배우는 과정에서 격려와 지지를 해주고, 하고 싶은 것이 있을 때는 도움을 주고, 실패를 했을 때는 용기를 북돋아 주는 것이 부모가 해야 할 일입니다. 그런데 아영씨의 아버지는 반대로 키웠어요. 아버지의 독재적이고, 강요적인 양육태도로 인해, 부모의 관심을 필요로 했던 아영씨가 얼마나 무기력하고 괴로웠을지 생각하면 마음이 아픕니다.

어머니는 존재감이 없었어요. 아버지가 집안의 독재자로 군림하고 가족들의 행동을 제약하다 보니 어머니는 힘도 없는 데다 숨죽여 있어야만 했겠지요. 자녀들의 성장과정에서 최소한의 보호도 못해줄 정도로요. 어머니라도 온기로 자녀들을 품어줬다면 어린 아영씨가 상처를 덜 받았을 겁니다. 부모의 인정과 지지를 받거나 무조건적인 사랑을 제대로 느껴봤다면 상처가 이렇게 깊어지진 않았겠지만 안타깝게도 혼자 속으로 삭히며 방치되듯 살아왔습니다.

성인이 된 당신이 여전히 아버지의 명령이나 요청을 거부하지 못하는 것은 어렸을 적 아버지가 했던 행동이 순간순간 떠오르기 때문입니다. 폭언과 폭력으로 가족들을 꼼짝 못 하게 했던 아버지에 대한 두려움이 마음 깊이 남았고, 여전히 삶에 짙게 드리워져 있는 거지요. 아영씨가 다른 사람의 기분을 지나치게 살피고 위축되고 전정긍긍하는 것도 이해합니다.

당신은 오랜 기간 공포스러운 가정 환경과 부모의 과도한 통제에 순응하며 의존적인 자아상을 만들어왔어요. 누군가를 실망시키거나 거부당할 것에 대한 두려움이 너무 큰 나머지 무조건 회피하려는 경향이 강해진 것 같아요. 그럴 때는 스스로 잠깐 멈추고, 상황을 직면하려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괴로운 상황에서 다른 사람의 반응은 민감하게 느끼지만 정작 자신의 감정과 행동은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지 않은지 돌아보는 겁니다. 앞으로 여러 사람과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야 하니 힘들더라도 연습을 해야 합니다.

아버지를 만날 때는 경계를 정하고 만나는 것이 좋습니다. 난폭하고 공격적인 아버지가 나이가 들었다고 해서 감정과 충동을 잘 조절하게 될 것이라고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 같아요. 그보단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을 정하고 그 수준을 넘으면 거절하거나 자리를 피하는 것이 현명한 방법입니다. 부담스러운 요구에 응하지 않고 자신이 결정해서 주도하는 관계의 패턴을 하나씩 만들어가야 합니다. 물론 그 과정은 순탄하지 않고 아버지는 더 강하게 행동하실 가능성이 큽니다. 아영씨에게 그 두려움은 자연스럽지만 그 순간을 버텨야 정서적 독립이 됩니다. 아버지를 외면하면 다른 가족이 고통받을 것이라고 했었지요. 가족을 걱정하는 마음은 당연하지만 그 역시 성인인 그들의 몫으로 돌려줘도 된다는 말을 해주고 싶어요.

이제부터 당신이 살아갈 인생이 얼마나 유일하고 소중한지 집중하길 바랍니다. 어릴 때는 부모가 절대적인 존재이지만 성인이 되면 완전히 자유로울 순 없어도 선택을 할 수 있지요. 아버지의 그림자를 천천히 지워내고 마음의 짐을 벗어버리는 것은 오롯이 당신의 결정이에요. 다행히 아영씨는 믿을 만한 사람을 만나 새로운 가족을 꾸렸습니다. 새 가족은 당신의 든든한 버팀목이 돼줄 거예요. 아영씨의 주체적인 삶을 응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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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 손효숙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