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변화에 대응하는 ‘기후 보험’의 조건

입력
2023.08.26 11:00
18면

편집자주

국내외 주요 이슈들을 해당 분야 전문가들이 깊이 있는(deep) 지식과 폭넓은(wide) 시각으로 분석하는 심층리포트입니다

1666년 영국 런던의 60%를 불태운 ‘런던 대화재’는 화재보험이 생겨난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불가항력적인 재난에 대비하고 피해를 구제하려는 방법을 보험에서 찾은 것이다. 역사적으로 보험이라는 제도가 그간 사회안전망 구축에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했는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지구가 새로운 위험에 직면했다. 기후가 변하고 있는 것이다. 지구의 지표면 평균온도(2011~2020년)는 산업화 이전보다 약 1.1도 높아졌다. 기후변화에 관한 정부 간 협의체(IPCC)도 10년 뒤인 2030~2035년엔 산업화 이전 대비 1.5도 상승할 가능성이 50%를 웃돌 것으로 전망했다. 기후변화를 초래한 원인에 대한 논의는 차치하더라도, 최근 대부분의 데이터는 지구의 평균기온이 상당히 올라갔음을 말해주고 있다.

세계보건기구(WHOㆍWorld Health Organization)는 기후변화를 ‘21세기 인류에게 닥친 가장 큰 위협’이라고 경고한다. 향후 2030~2050년 사이에 기후변화로 인해 연간 약 25만 명의 추가 사망자가 발생할 것이라는 WHO의 분석 결과는 가히 충격적이다. 이런 기후변화는 머나먼 지구촌 이야기가 아니다. 2010년 이후 우리나라 평균기온은 1980년대와 비교해도 약 1도 높아진 것으로 나타났다.

그렇다면 ‘평균기온 1도’는 얼마나 큰 변화일까? 2015년 채택된 ‘파리기후변화협약’은 지구촌 평균기온 상승을 2도가 아닌 1.5도로 제한하기 위한 세계 195개국의 약속이다. IPCC에 따르면 평균기온이 1.5도가 아닌 2도까지 상승하는 경우 심각한 열 환경에 노출되는 인구는 약 17억 명 더 증가할 수 있다고 한다. 평균기온 1도, 아니 0.5도가 얼마나 중요하고 큰 의미가 있는지 실감할 수 있는 대목이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이익을 추구하는 기업들도 앞다투어 ESG(Environmental, Social, Governance: 환경, 사회, 지배구조) 경영을 도입하고 있다. 지속 가능한 이익을 추구하기 위해서는 결국 탄소 배출을 줄여야 한다고 인식했기 때문이다. 보험회사를 포함한 국내 대부분의 금융회사들도 ESG 경영을 실현하고 있고, 금융기관의 경우 ESG 관련 리스크를 각종 평가 자료에 반영하는 등 ESG 투자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중에서도 보험회사는 ESG 투자는 물론, 자체 보험상품을 통해서도 기후변화 대응에 적지 않은 역할을 할 수 있다.

현재 지구상에 일어나고 있는 기후변화는 불가항력적인 것으로 보인다. 폭염, 폭우, 가뭄 등의 횟수가 증가하고 이에 따라 고열 사망자, 전염병, 식량난이 증가할 것이다. 국내 건강보험심사평가원 통계에 따르면, 온열질환 환자 수 및 요양급여 비용은 증가 추세다. 특히 폭염일수와 온열질환 환자 수는 상당한 상관관계를 보인다. 폭염 현상으로 인해 국민의 건강에 적신호가 켜진 것이다. 기후 재난에 대비한 보험인 ‘기후 보험’이 필요한 이유다.

결국 기후 보험이란, 기후위기로부터 국민을 보호하기 위한 사회 안전망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그렇다면, 기후 보험은 어떤 조건을 갖추어야 할까.


첫째, 기후 보험은 정책 보험의 성격이 필요하다. 정책 보험이란 정부가 보험료를 지원하거나, 재보험자 역할을 수행하는 등의 정부 지원이 존재하는 보험을 의미한다. 기온 상승에 따른 피해는 광범위하고도 급작스럽게 찾아온다. 개인적으로 대비하기에는 한계가 있다. 특히 저소득층의 경우 이런 고온 피해에 더욱 취약하다. 냉방시설이 없어 실내 온도 조절이 어려운 경우, 뜨겁게 달궈진 집 안은 오히려 안식처가 아닌 위험한 곳이 되어 버릴 수도 있다. 그렇다고 개인적인 대응책을 마련하기에는 경제적 어려움이 크다. 정책 보험 성격이 가미돼야 하는 이유다.

둘째, 지원 대상자와 구제 대상의 확대가 필요하다. 현재 자연재해에 대응할 수 있는 국내 보험 상품은 농작물 재해보험, 풍수해 보험, 가축 재해보험, 양식수산물 재해보험 등으로, 주로 재난으로 인한 농가의 재산 피해를 보장해 준다. 이런 보험들은 정부 및 지자체가 50% 이상의 보험료를 지원하는 정책 보험이다. 자연재해에 따른 피해를 보상해 줌으로써 농가 소득의 안전망을 구축하고 생산성을 향상하기 위함이다.

기후변화에 따른 피해도 이런 피해들만큼 광범위해졌다. 특히 노인, 영유아, 만성 질환자 등의 노약자, 그리고 건설업, 배달업 등 외부 노출이 많은 근로자의 경우 온열질환 같은 기후변화 피해에 취약하다. 그러므로 농수산물 등 재산상의 피해뿐 아니라, 일반 국민(특히 취약 그룹)의 신체 상해 또한 구제 대상이 돼야 한다.

더 나아가 기후변화에 따른 피해 구제 범위를 생산성, 즉 수입 손실 부분까지 확대해야 할 필요도 있다. 실제로 미국의 한 스타트업 보험사는 3일 이상 폭염이 지속될 경우 보험 가입자에게 일당을 지급하는 보험 상품을 선보이기도 했다. 이 경우, 보험 가입자는 무리한 외부 근로 활동을 자제할 수 있고, 폭염에 따른 신체 상해의 위험도 사전에 방지할 수 있다.

셋째, 기온과 관련된 최신 혹은 향후 예측 데이터를 활용한 위험 평가 작업이 진행돼야 한다. 보험에서 말하는 계리(計理)란 통계 및 수리적 방법으로 리스크를 측정하여 보험료 및 책임 준비금의 적정 수준을 산출하는 것을 말한다. 보험회사는 이 보험계리를 통해 적정한 보험료를 측정한다. 적절한 보험료는 해당 보험의 지속가능성을 보장한다. 기후변화에 따른 피해를 구제하기 위한 기후 보험은 말 그대로 변화하는 기후에 대비하는 것이다. 따라서 과거에 축적된 데이터에 의존하기보다는, 최신 데이터에 높은 가중치를 주고 예측 데이터까지 반영된 리스크 평가가 필수적이다.

국제노동기구(ILO) 등 다양한 국제기구에서 추구하는 적응형 사회 보호(ASP·The Adaptive Social Protection) 접근 방식은 기후변화 위기에 직면한 모든 사람에게 포괄적인 보호를 제공하는 것이다. 최근 ILO에서는 ASP 방식의 일환으로 가장 심각한 기후위기에 직면한 국가 중 하나인 인도네시아를 중심으로 한 사회 보험에 대한 논의가 있었다. 실업 및 산업재해보험, 연금제도 등을 중심으로 보험 가입자에 대한 추가 혜택 제공, 적용 범위 확대, 자격 요건의 임시적 완화, 기후위기 영향을 받는 근로자들에 대한 새로운 프로그램 도입 등에 대한 검토를 그 골자로 한다.

이를 위해서는 기후변화 영향에 대한 연구, 기존 보험의 적용 범위 확장을 위한 제한 사항 완화, 보험계리에 기후변화 위험성 반영, 사회보험제도 필요성에 대한 사회적 합의 등이 필요할 것이라고 제안됐다. 특히 사회보험제도의 개선사항으로 기후변화의 영향을 받는 사람들에 대한 추가 혜택 지급, 기후변화에 따른 근로자 상해 또는 사망을 보장 범위에 추가, 자연재해로 인한 실업을 보상하는 방안 등이 제기되었다. 기존의 사회보험을 기후위기에 대한 포괄적인 보호 수단으로 사용하기 위한 방안이 논의되고 있는 것이다.

기후변화에 따른 피해는 이미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는데, 피해 보상 공백은 점점 커져만 간다. 자연재난에 대비한 정부 역할은 어쩌면 필수 불가결한 것일지 모른다. 향후 기후변화 위기에 직면한 국가들의 기존 사회 보장 프로그램 및 사회적 합의에 따라 사회 보험의 개선 정도는 달라질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사회보험제도가 사전에 수립되어 있다면 마련된 절차에 따라 보험 가입자를 즉각적으로 지원할 수 있는 강점을 가질 수 있다. 불가항력적인 재난에 대비한 ‘기후 보험’, 특히 사적으로 대비하기 어려운 계층에 대한 정책 보험 성격을 지닌 ‘기후 사회보험’ 도입을 진지하게 검토해야 할 시점이다.

보험연구원 금융제도연구실 연구위원으로 재직 중이다.

고려대학교 경제학과 졸업 후 한국은행에서 근무했다. 이후 미국 캘리포니아대학교 데이비스캠퍼스 농업자원경제학과에서 석사·박사 학위를 받았다.

응용미시경제학 및 환경경제학 분야에서 다양한 연구를 진행하고 있으며, 특히 전기 자동차, 전기차 배터리, 기후변화 등에 따른 경제적 변화, 영향 및 정책에 대해 연구하고 있다.

천지연 보험연구원 연구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