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속 '이상향'이 현실로... 티베트의 첫 동네 샹그릴라

입력
2023.08.26 10:00
<122> 차마고도 ② 샹그릴라에서 동죽림까지

1933년 영국인 제임스 힐튼(James Hilton)이 소설 ‘잃어버린 지평선(Lost Horizon)’을 발표한다. 히말라야 깊은 산속 어딘가에 비행기가 불시착하더니 티베트의 ‘이상향’에 들어간다. 상상으로 그린 마을이 현실로 등장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을 거다. 2001년 12월 중국 국무원이 행정 지명 변경을 허락했다. 윈난성 북부의 작은 마을 중덴(中甸)이 돌연 샹그릴라(香格里拉)가 됐다. 차마고도의 마방이 티베트로 진입하는 첫 동네다.

티베트 차마고도의 관문, 샹그릴라

샹그릴라 시내로 들어서니 티베트 불탑인 초르텐이 나타난다. 왜 꼭 여기가 ‘이상향’이어야 했을까? 쥐꼬리만한 근거를 찾았다. 고성이 하나 있는데 두커쭝(獨克宗)이라 부른다. ‘바위에 세운 성’이자 월광성(月光城)이다. 1,300년 전부터 토번(티베트)의 영토였다. 명나라 시대에 리장의 나시족 토사(지방 벼슬)가 힘을 길러 북쪽으로 진출했다. 또 다른 요새를 지었고 니왕쭝(尼旺宗)이라 했다. 지금은 사라졌지만 일광성(日光城)이다. 두 성곽이 짝을 이루게 된다. 샹그릴라를 ‘마음에 담은 해와 달’이라 하는 까닭이다.

고성에 거북처럼 야트막한 귀산(龜山)이 있다. 청나라 초기에 세운 대불사가 우뚝 솟아 있다. 계단 따라 오르는데 해발 3,400m라 숨이 가쁘다. 사찰 담장 뒷길 따라 한 바퀴 돌며 고성을 바라본다. 가옥이 오밀조밀하게 붙어 있다. 날씨가 청정한 기운을 담아 평화로운 장관이다. 오랜 역사를 지닌 고성이자 차마고도의 쉼터였다. 하늘은 계절의 영향을 받아도 삶은 변하지 않는다. 통치자는 스쳐가도 문화는 남는 법이니.

사원 크기에 어울리지 않게 거대한 마니룬(Mani Wheel)이 있다. 높이 21m, 지름 6m에 이르고 무게가 60톤이다. 세계에서 가장 크다 자랑하기에 충분하다. 도금을 해 반사되는 햇빛이 강렬하다. 눈높이에 불교 길상인 소라, 깃발, 매듭, 연꽃, 항아리, 물고기, 양산, 법륜이 보인다. 다양한 표정과 자세를 한 인물이 배치돼 있고 고산 아래 사원도 새겨져 있다. 10명 정도가 돌려도 끄덕하지 않는다. 사람이 더 모여 "영차" 하며 힘을 쓰니 서서히 돌아간다. 점점 빨라지니 모두 신바람이 난다. 한바탕 웃고 떠들며 돌리고 나니 기운이 솟구친다. 고산 반응도 오는 듯하다.


고성 입구에 야크 몇 마리가 관광객을 기다리고 있다. 환영인사로 걸어주는 카딱(哈達)을 머리에 묶고 예쁘장하게 서 있다. 하얀 야크는 보기 드물다. 안장을 놓았으니 돈벌이 수단이다. 티베트에서 영물로 여기는 동물이다. 슬픈 듯 물끄러미 바라보는 시선에 흠칫 놀란다. 고성 주변에 야크 고기를 음식 재료로 하는 식당이 많다. 옛날에는 먹지 않았는데 요즘은 일행과 함께 간혹 맛을 본다. 야크의 시선에서 서둘러 벗어난다.

고성으로 들어선다. 나뭇가지를 태우는 외상로(煨桑爐)와 초르텐이 보인다. 바닥 쪽에 작은 마니룬이 걸려 있다. 주민들은 불탑을 지날 때마다 돌린다. ‘옴마니밧메훔’ 진언을 따라 외우는 일상의 과정이다. 관광지로 이름을 떨치면서 가옥은 객잔과 카페로, 가게와 식당으로 변모했다. 2013년 처음 갔을 때 분위기는 정말 왁자지껄했다. 외국인 여행자로 넘쳐났다.

2014년 1월 11일 새벽, 고성에 불행이 닥쳤다. 한 객잔 주인이 만취 상태로 자다가 난로를 건드려 화재가 났다. 목조건물인 고성은 순식간에 화염에 휩싸였다. 고성의 3분의 1을 태웠다. 샹그릴라의 추억으로 가득한 사람들의 마음을 우울하게 만들었다. 골목을 따라 고성의 중심인 사방가(四方街)로 간다. 그 옛날 고성 분위기가 아니다. 복구와 재건을 거치며 건물이 너무 산뜻해졌다.


러시아 작가 피터 굴라트(Peter Goullart)가 1955년 ‘읽어버린 왕국(Forgotten Kingdom)’을 출간했다. 1940년대 9년 동안 리장 일대에서 살았던 경험을 쓴 책이다. 매년 찻잎 200톤가량을 라싸로 운송하던 시절이다. 노새 8,000마리가 동원됐다고 증언하고 있다. 고성마다 ‘수많은 말발굽과 마방 무리로 넘쳐났다’고 기록했다. 차마고도가 여전히 생명력을 지니고 있을 때다. 지금은 흔적이 사라졌지만 마방의 안식처이던 고성이다. 화마도 과거를 다 태워버리지는 못했다. 여전히 티베트의 향기가 풍긴다. 마음속에 어떤 달이 뜨는지 궁금한 고성이다.


밤이 오면 라이브 음악이 흘러나온다. 사방가에 주민들이 나와 둥글게 원을 그리며 춤을 춘다. 관광객도 함께 섞인다. 여전히 샹그릴라는 여행자의 로망으로 손색없다. 고성 분위기와 ‘이상향’ 이미지가 잘 어울린다. 마방의 거침없고 땀내 나는 몸짓은 그저 상상 속에서 마주칠 뿐이다. 어둠이 깊어가는 창문에 마니룬이 달라붙는다. 조명 덕분에 부처의 가르침이 더더욱 널리 퍼지는 듯하다. 자정이 넘자 고성의 불빛도 자취를 감춘다.

작은 포탈라궁, 샹그릴라의 송찬림

윈난 최대의 티베트 사원 송찬림(松贊林)으로 간다. 고성에서 북쪽으로 4km 떨어져 있다. ‘송찬’은 천상의 삼신(三神)이 거처하는 지방이고 ‘림’은 사원을 뜻한다. 대부분 송찬림사라 부르는데 ‘역전앞’이다. ‘작은 포탈라궁’이라는 찬사를 받을 만큼 웅장하다. 사원과 부속 건물로 산을 다 덮었다. 하늘의 색감과 어우러져 화사하다. 두둥실 구름도 스쳐 지나니 참 해맑은 느낌이다. 햇살을 그대로 받은 사원이 고스란히 본색을 드러낸다.

5세 달라이라마 시대인 1681년 준공했다. 송찬림 앞에 갈단(噶丹)이라 쓴 편액을 하사했다. 정문에도 갈단송찬림사라 적혀 있다. 티베트 말로는 사뭇 달라 가단쏭짼링(dgav-ldan-srong-btsan-gling)으로 읽는다. 갈단은 도솔천이란 뜻이다. 고대 불교에서 말하는 천상의 나라이자 석가모니가 머물렀으며 미륵보살이 사는 장소다. 달라이라마의 조사인 종교개혁가 쫑카빠가 세운 가단사(噶丹寺)를 추앙한다는 뜻이다. 라싸 동쪽에 위치한 간댄사(甘丹寺)를 말한다.

골목이 나오고 가파른 계단이 보인다. 양쪽으로 승려가 거주하는 건물이 다닥다닥 붙어있다. 20여 명씩 공동으로 생활하는 숙소가 많다. 승단 조직의 기초 단위인 미챈(Mi-tsen)이다. 계율 받은 승려가 거주하는 건물인 캄챈(Kham-tsen)은 모두 8채 있다. 연꽃의 여덟 잎을 상징하며 티베트 문화권 어디에나 있는 일반 조직이다. 다창(Dra-tsang)이 가장 큰 공간이다. 계단 위쪽에 찬란하게 빛나는 건물이 다창대전이다. 1,6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학원이며 불당이다.



땀을 흘리며 계단을 오른 후 광장으로 간다. 3개의 전각이 나란하다. 가운데 다창대전을 중심으로 왼쪽에 쫑카빠, 오른쪽에 석가모니를 봉공하는 대전이 있다. 쫑카빠가 만든 종파인 겔룩빠의 법왕이 달라이라마다. 마름모꼴로 생긴 노란색 모자를 쓰기에 황모파(黃帽派)라 부른다.

5층 규모의 다창대전은 정말 넓다. 티베트 불경이 빼곡한 벽을 따라 한 바퀴 돌아본다. 5세 달라이라마 동상도 보인다. 석가모니 대전 앞에 붉은 가사를 걸친 승려들이 있다. 안으로 들어갔다 나오자 티베트 말을 하는데 알아들을 수가 없다.

대전 지붕은 화려한 장식으로 눈부시다. 맹수가 노려보고 있고 원통의 마니룬이 하늘을 향하고 있다. 가운데에는 법륜을 사이에 두고 사슴 한 쌍이 햇살 바라기처럼 앉아있다. 제자리인 양 티베트 사원의 전각에 반드시 등장한다. 도금한 까닭에 샛노란 빛을 반사하고 있다. 석가모니가 최초로 설법한 녹야원에서 경청한 까닭에 영광스러운 지위를 뽐낸다. 수레바퀴를 따라다니며 부처의 가르침을 온 세상에 널리 전파할 태세다.

신선과 학이 노니는 명당, 동죽림

차마고도의 다음 목적지 옌징(盐井)까지는 280km다. 국도를 쉬지 않고 달려도 7시간 걸린다. 마방은 얼마나 걸렸을까 궁금하다. 노새나 말을 끌고 가지 않으니 가늠하기 어렵다. 지프차로 1시간을 달려 시우이대교(西歸大橋) 앞에 멈춘다. 절벽을 따라가는 길이라 다리도 까마득히 높다. 내려다보니 금사강이 조그맣게 보인다. 능선에는 사람이 닦아놓은 길이 보일 듯 말 듯하다. 마치 뱀이 다닌 것처럼 긴 줄이다. 협곡을 헤치고 고산을 넘던 차마고도의 오래된 기억이다.

번쯔란(奔子欄) 마을을 지난다. 티베트 말로 ‘금빛 모래톱’이다. 차마고도가 지나는 요충지다. 차창 밖으로 보니 줄기차게 금사강이 흐른다. 고도를 점점 높이다가 전망대 앞에 정차한다. 물줄기가 야트막한 봉우리를 휘감고 흘러간다. 금사강제일만이라 부른다. 보름달을 떠올렸는지 별칭은 월량만(月亮灣)이다. 우기라 강물이 누렇지만 겨울에는 옥으로 빚은 듯 푸르다 한다. 상상만으로도 설렌다. 봉우리를 뛰어넘지 못해 빙그르르 휘돌아가는 풍광을 선사하니 대견스럽다. 강은 두 성의 경계이니 봉우리는 쓰촨성이다.

계속 구불구불한 길을 달린다. 때맞춰 창문을 여니 산비탈에 유난히 반짝거리는 건물이 보인다. 사원 지붕이 햇살을 제대로 흡입하고 있다. 천천히 절벽 위 마을로 다가간다. 설산이 바람막이를 하고 있어 겨울에 춥지 않고 여름에 덥지 않은 명당이라 한다. ‘신선이 기르는 학이 노니는 호수’라는 별명이 붙은 동죽림(東竹林)이다. 1667년 처음 세웠다.


마니룬을 돌리며 마당으로 들어선다. 4층 높이의 대경당(大經堂) 앞에 선다. 정문을 가리고 있는 검은 천에 법륜과 사슴, 매듭 문양이 산뜻하다. 창문을 가린 문양은 정전제 봉토처럼 아홉 등분된 모양이다. 양팔로 껴안아야 할 만큼 커다란 나무 기둥 82개가 받치고 있다. 쫑카빠와 두 제자인 사도삼존(師徒三尊)을 봉공하고 있다. 사대천왕이 그려져 있는데 얼굴색이 모두 다르다. 빨강, 하양, 파랑, 노랑으로 나눠 그린 까닭이 궁금한데 사원이 너무 조용하다.


다시 길을 떠난다. 국도는 너무 한산해 반대편에서 차가 오면 반가울 정도다. 풀과 나무가 푸릇푸릇하고 듬성듬성 집도 나타난다. 마을도 있다. 능선에는 누가 언제 만들었는지 모를 산길도 보인다. 언뜻 노새의 방울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환청인지 환상인지 모르겠다. 꾸벅꾸벅 졸린데 일정한 속도로 달려서 그렇다. 비슷한 풍광이 지속돼도 마찬가지다. 화면이 넘어가면 좋겠다 생각하는 찰나, 갑자기 나타난 설산에 두 눈이 번쩍 뜨인다. 한여름에 설산을 넘어가야 한다는 말이다.

최종명 중국문화여행 작가 pine@youyu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