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개발(R&D) 사업 효율화를 강조해 온 정부가 내년도 주요 R&D 예산을 올해보다 14% 삭감하기로 했다. 이른바 '이권 카르텔' 요소가 있거나 불필요하다고 판단한 사업 108개를 통·폐합한 결과다. 정부는 R&D 예산이 몸집만 불어나지 않도록, 상대평가 하위 20% 연구들은 구조조정해 나간다는 계획이다. 과학계는 정부가 R&D 관리 책임을 연구자들에게 떠넘긴다며 반발하고 있다.
이종호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장관은 22일 '정부 R&D 제도 혁신 방안과 2024년 국가연구개발사업 예산 배분·조정 결과' 브리핑을 열고 "지난 정부에서 예산은 10조 원 이상 늘었지만, 시스템·인력은 그대로였다"며 "낡은 R&D 관행과 비효율을 걷어내고 퍼스트 무버로 혁신해 가겠다"고 밝혔다.
'과학계 R&D 이권 카르텔'을 청산 대상으로 지적해 온 정부는 주요 R&D사업 중 108개를 통폐합하기로 했다. 이에 따른 내년도 주요 R&D 예산은 올해(24조9,500억 원) 대비 13.9% 적은 21조5,000억 원이다. 정부가 주요 R&D 예산을 삭감한 것은 2016년 이후 8년 만인데, 당시 삭감 규모가 전년 대비 0.4%(550억 원)였던 것과 비교하면 이번이 훨씬 규모가 크다. 해당 예산안은 국회에 송부된 뒤 논의를 거쳐 최종 확정된다.
이 장관은 "나눠 먹기 형식으로 연구비를 가져간다거나, 연구기획 단계에서 특정 단어를 넣어 유리하게 하는 등 카르텔적 요소가 있었다"면서 "최근 몇 년간 예산이 급증한 분야에 대해서도 임무 재설정, 예산 재구조화가 이뤄졌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구체적으로 어떤 사업에서 카르텔적 면모가 드러났는지는 언급을 피했다.
확보된 예산은 혁신, 필수 R&D에 집중된다. 우선 혁신 R&D에는 예산의 절반인 10조 원을 들인다. 특히 첨단바이오·인공지능(AI) 등 7대 핵심분야를 중심으로 한 국가전략기술 발전을 위해서는 투자 규모를 5조 원가량으로 증액한다. 국가 임무 수행을 위한 필수 R&D는 국방, 공공, 탄소중립, 사업화의 4개 분야로 나눠 기술개발·고도화에 뒤처지지 않게끔 지원한다.
정부는 한시적 구조조정에 그치지 않고 R&D 체질 개선을 해내겠다는 구상이다. 특히 범부처 R&D통합관리시스템(IRIS)에 AI·빅데이터 기술을 접목해 관리하고, R&D 사업에 전면 상대평가를 적용해 하위 20%의 미흡한 사업이나 문제가 지적된 사업은 구조조정하고 차년도 예산을 깎는다. 주영창 과기부 혁신본부장은 "그간 부처들이 R&D 평가에 '미흡'을 주는 비율이 매우 낮았는데, 이를 상향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정부의 이번 발표가 예산 재검토를 공식화한 이후 2개월도 채 되지 않아 나온 데 대해 과학계 일각에선 "졸속"이라며 격앙된 반응이 나온다. 불필요한 낭비는 막아야겠지만, 사실상 '되는 사업'만 밀어줄 우려가 있다는 것이다. 이덕환 서강대 화학과 명예교수는 “정부가 R&D 비효율성의 책임을 과학기술계에 떠미는 상황은 매우 모욕적”이라며 “근거 없이 비율을 정하고 자르는 것은 최소한의 존중도 없이 과학자들 의지를 꺾어버리는 것”이라고 강하게 비판했다. 또 다른 원로 기초과학자는 "당장 업적이 나오는 연구만 하고, 미래를 바라보는 고위험 연구는 하지 말라는 신호와 다를 바 없다"면서 "과학자들의 오랜 노력이 빛을 봐야 할 시기에 찬물을 끼얹는 꼴"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미 '카르텔'로 몰릴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휩싸인 과학계가 더욱 움츠러들 것이라는 걱정도 크다. 서울대의 한 이공계 교수는 "과학자는 물론 과학기술단체까지 카르텔, 범죄자 취급당한 초유의 사태"라며 "R&D '칼질' 기조가 연구자들에게는 (자유로운 연구를 막는) 일종의 통제로 느껴질 가능성이 있다"고 우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