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이 주단을 깔아준 성우. 서혜정(61) ‘서혜정낭독연구소’ 소장(KAC한국예술원 교수)의 이력을 보면 그런 생각이 든다.
스무 살에 KBS 성우공채 시험에 1등으로 합격, 그 뒤로 탄탄대로를 걸었다. 1990~2000년대를 풍미한 인기 미드 ‘X파일’의 주인공 스컬리(질리언 앤더슨)역을 10년이나 맡았고, 2009년엔 tvN의 ‘재밌는 TV 롤러코스터-남녀탐구생활’의 내레이터로 성우 연기의 새 장을 열었다. ‘생로병사의 비밀’ 역시 그의 음성으로 기억되는 프로그램 중 하나다.
목소리로 받을 수 있는 상이란 상도 죄다 휩쓸었다. 1987년 KBS 신인 성우상을 시작으로, KBS 최우수 성우상(2000), KBS 외화 더빙상(2001), 케이블 TV 스타상(2010), 한국 PD협회 성우상(2011), 한국방송대상 성우 내레이션상(2011), 대한민국 대중문화예술상 문화체육부장관상(2011), 흰지팡이의 날 사회봉사상 국회의장상(2011)까지.
“실제 이렇게 생각했죠. ‘나 서혜정이야~!’”
자기 머리 위에 아무도 없는 듯. 성우가 된 지 20년까지는 말이다.
2002년 ‘이제 내 목소리로 돈을 한번 벌어보자’는 생각으로 오디오북 사업에 뛰어들었는데 전 재산을 날렸다. 잇단 실패와 위기는 그를 처음으로 돌아가게 했다. 집안이 쫄딱 망해 판자촌 천막집에 살던 시절, 그마저도 철거돼 지붕도 없이 바닥만 남은 집에서 엄마랑 둘이 자던 밤에 했던 기도로.
열다섯 소녀는 설움이 한꺼번에 북받쳐 별을 보며 눈물범벅으로 바랐다. ‘꼭 성우가 되게 해주세요. 빨리 되고 싶어요. 엄마가 고생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잡다한 상념이 섞이지 않은 순수한 첫 마음이었다.
그가 성우를 꿈꾼 계기는 낭독이다. 천둥번개 치던 밤 홀로 엄마를 기다리는 무서움을 달래려 교과서를 소리 내어 읽었던 게 시작이다.
예상치 않게 닥친 좌절의 시기, 그는 첫 마음의 자신을 떠올렸고 다시 ‘나에게 낭독’을 했다. 욕심을 비워낸 자리는 소명으로 채웠다. “나는 목소리로 다 이룬 사람이에요. 목소리로 이루고자 했으나 실패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아요. 그들이 꿈을 이루도록 도우며 살자고 결심했죠.”
그를 다시 일어서게 한 힘도 낭독이었다.
-어린 시절에 어떻게 성우라는 구체적인 꿈을 갖게 됐나요.
“중학교 1학년 때 교과서를 읽으면 선생님이 페이지가 넘어가는 줄 모르고 쭉 듣고 계시거나, 반 친구들도 ‘혜정이더러 계속 읽으라고 해요~’라고 하곤 했어요. 듣기에 좋았던 거죠. 그러다가 국어 선생님이 어느 날 ‘너 성우를 한번 해보려무나’ 하신 말씀에 꿈이 생겼어요.”
-어떻게 그렇게 잘 읽었나요.
“아버지 사업이 망해서 판자촌에 살았어요. 아버지는 지방에 계시고 엄마도 일하러 나갔다가 늦게 오시니 밤에 혼자 있어야 했죠. 어느 날은 천둥번개가 치면서 비가 내리는데 너무 무섭더라고요. 소리 내서 책을 읽어보니까 좀 낫더라고요. 그래서 전 과목을 읽으면서 공부를 한 거예요.”
초등학교 저학년까지만 해도 그의 집엔 없는 물건이 없었다. 미군부대 군 매점(PX)에서 근무한 부친 덕분이었다. 연필깎이부터 다리미에 코렐 그릇까지 그의 집엔 ‘미제’가 풍족해 친구들의 부러움을 샀다. 주한미군 일부가 철수(1971)하면서 부친도 퇴직했고 가세가 기울기 시작했다.
그가 아직도 기억하는 금액이 있다. 1만8,400원. 중학교 입학금이다(당시는 의무교육이 아니었다). 그 돈이 없어 그는 진학을 포기하고 공장에 취직하려고 했다. 동네 새마을금고에서 주는 장학금이 유일한 희망이었는데 1등을 놓치고 만 것이다. 하늘이 도왔다. 1등을 한 학생이 2등인 그에게 장학금을 양보했다. 그의 사정을 딱하게 여긴 담임교사가 1등 학생의 부모를 설득한 게다.
입학은 했어도 당장 2분기 등록금이 또 문제였다. ‘진짜 공장에 들어가야 하는구나.’ 이번에도 행운이 찾아왔다. 학교 매점에서 일하며 학교를 다니는 ‘근로장학생’ 기회가 생긴 것이다. 담임의 제안에 그는 1초도 안 쉬고 “네!” 했다.
-매점 일과 학업을 병행하기가 쉽지는 않았겠죠.
“고단했죠. 매일 새벽 5시에 집을 나섰어요. 새벽 6시에 문을 열어야 하니까. 청소를 하고 있으면 새벽 6시 30분 우유 아저씨를 시작으로 도너츠, 학용품까지 착착 물건이 들어와요. 그럼 새 물건은 진열하고, 전날 안 팔린 건 반납하죠. 쉬는 시간 종 치자마자 달려가서 문 열어야 하니까 자리도 늘 교실 뒷문 앞이었어요. 매점 정리하고 집에 가면 오후 9시. 그러니 공부할 시간이 어디 있겠어요. 성적이 뚝뚝 떨어졌죠. 그러다가 매일 밤 교과서를 읽다 보니 나중엔 성적도 오르더라고요. 돌이켜 보면 그게 낭독 훈련이었어요.”
그 시절 삶의 무게가 한꺼번에 밀려온 사건이 있었다. 추운 겨울날이었다. 출근해 매점 문 자물쇠에 열쇠를 꽂아봤지만 도통 들어가지 않았다. 꽝꽝 얼어버린 거였다. ‘빨리 열어야 청소하고 물건을 받을 수 있는데…’ 입김도 불어봤다. 다급한 마음과 달리 비정한 열쇠는 꿈쩍하지 않았다. 설상가상. 입술이 얼음장 같은 자물쇠에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눈물이 차 올랐다. ‘왜 이렇게 살아야 하는 걸까.’ 뚝뚝 눈물이 떨어졌다. 그때 처음 눈물이 뜨겁다는 걸 알았다. 서러움과 화가 뒤섞인 마음 한편으로 ‘아, 눈물을 맞으면 자물쇠가 열리겠구나’란 생각이 들었다.
-고단한 생활이 언제까지 이어졌나요.
“고등학교 1학년 2학기쯤 돼서야 노동에서 해방됐어요. 엄마가 자그마한 백반 집을 차렸는데 다행히 잘되기 시작해 직원을 뒀거든요. 그제야 학교를 둘러볼 시간도 생겼죠. 방송반이 있더라고요. 들어가고 싶었는데 이미 신입 회원을 다 뽑았고 선발 계획이 없다는 거예요.”
-그래서 어떻게 했나요.
“너무 슬퍼서 그날 밤 담임 선생님께 편지를 썼어요. 그간 나의 스토리를 전부 다 적었죠. 다섯 장쯤 됐을 거예요. 다음 날 학교에 가서 다시 읽어보니 도저히 안 되겠더라고요. 다시 책가방에 넣어뒀죠. 종례를 마치고 선생님이 교실을 나서는데 저도 모르게 ‘선생님!’ 하고 불렀어요. 선생님이 돌아보는데 뭐라 할 말이 없는 거예요. 가방 속에 있던 편지를 드리곤 뒤돌아 뛰어왔죠. ‘내가 왜 그랬지’ 자책하면서.”
하늘이 또 손을 내밀었다. 편지를 읽은 담임 교사가 방송반 지도 교사에게 그걸 건넨 거다. “사정을 고려해달라”며. 마침 2학년생 하나가 전학을 가게 돼 빈자리가 생긴 터였다. 그의 방송반 입성 스토리다. 방송반은 그가 성우 인생을 시작하는 발판이었다. 방송반 시절 서울예술대학이 주최하는 방송경연대회에 출전해 라디오 드라마로 대상을 받았기 때문이다. 동시에 개인상까지 수상해 서울예대에 특별전형으로 입학할 수 있는 혜택을 얻었다. 이어 대학에 들어간 지 두 달 만에 KBS 성우공채에 합격했다.
-진짜 성우가 되니 어땠나요.
“꿈만 같았죠. 회사에서 살고 싶을 정도로 좋았어요. 퇴근 시간인 오후 6시가 다가오면 다들 퇴근 버스 타려고 서두르는데 나는 집에 가기가 싫은 거예요. 숙직실에다 샤워장도 있겠다, 지하에 구내식당 있겠다, 집에는 가끔 엄마 보고 싶을 때 가면 되지 퇴근할 이유가 없더라고요. 그런데 숙직실에는 남자만 잘 수 있다는 거예요. ‘내가 남자라면 얼마나 좋을까’ 싶었다니까요. 우리 집까지 가는 버스 막차 시간이 오후 10시 45분인데 매일 막차를 탔어요.”
-그때까지 회사에서 뭘 했어요.
“당시 KBS 라디오 채널이 3개라서 드라마가 30편 정도 됐어요. 성우실 캐비닛 두 개에 그 드라마들 대본이 꽉꽉 들어차 있었어요. 매일 밤 혼자서 대본들을 봤죠. 급사(잔심부름을 하는 직원)가 새로 나온 대본을 갖다 주면 다 읽어보고 선배들 분량에 미리 표시도 해두고 오타도 찾아서 고쳐놓고 하는 거죠. 그때 나는 여자1, 여자2 같은 단역을 할 때였지만, 모든 대본이 내 머릿속에 있었죠.”
-실력도 확 늘었겠네요.
“대본 연습할 때 갑자기 못 오는 선배가 있으면 대신하기도 했거든요. PD들이 놀라곤 했죠. 대본 파악이 돼 있는 상태잖아요. 그러니까 굵직한 조연을 주더라고요. 그래서 금방 성장했어요.”
-한계에 부딪힌 일은 없었나요.
“우연히 ‘출동 730’이라는 아침 프로그램 공동MC를 맡게 됐어요. 당시 담당 PD가 성악가 출신이었는데, 저더러 ‘이렇게 발성이 안 되는데 어떻게 성우가 됐느냐’면서 (소리를 제대로 내라고) 두툼한 손으로 등판을 퍽퍽 치는 거예요. 화장실 가서 많이 울었죠. 그때 혹독하게 발성 훈련을 했어요.”
-성우도 결국 연기자인데 어땠나요.
“당시만 해도 성우들이 대사할 때 (톤을) 굉장히 정돈해서 했어요. 그걸 듣는데 너무 이상하더라고요. ‘현실에선 저렇게 말하지 않는데’ 싶었죠. 그래서 저는 실제 말하듯이 했어요. 어느 날 연출을 맡았던 임영웅 선생님이 돋보기 안경을 살짝 내리고 빤히 저를 쳐다보시더라고요. 속으로 ‘잘못했나’ 했는데 아무 말씀 안 하시더라고요. 그러더니 작가 선생님들 모임 자리에 저를 데리고 가시더니 이렇게 말씀하셨죠. ‘이 놈이 새로운 화법을 써. 근데 이 놈이 맞는 것 같아’라고요.”
-‘서혜정’ 하면 ‘스컬리’잖아요.
“그렇죠. 10년을 했으니까. 스컬리 음성은 제 취약한 부분을 커버하려고 개발한 방식이에요. 호흡을 아주 많이 써서 연기를 한 거죠. 스컬리는 굉장히 지적인 여성이거든요. 말도 큰 소리를 내지 않고 차분하게 하는 캐릭터죠. 부드러운 카리스마가 느껴져야 했어요. 그걸 표현하려면 호흡을 많이 써야겠더라고요.”
-성우로 실패한 작품도 혹시 있나요.
“(아쉬운 표정을 지으며) 영화 ‘보디가드’요. 주인공 레이첼(휘트니 휴스턴)역을 맡았는데, 그때 감기가 너무 심하게 걸렸어요. 그럼 목소리를 자유자재로 쓰지 못하거든요. 스탠바이 상태라 일정을 바꿀 수도 없고요. 웬만한 감기면 약간 콧소리가 나긴 해도 대개 큰 무리 없이 할 수 있거든요. 그런데 그때는 된통 걸린 거예요. 음역대를 자유롭게 왔다 갔다 할 수 없을 정도였죠. 성우는 목소리의 매력으로 듣는 사람의 귀를 낚아 채야 하는 사람들이에요. 그래야 한 프로그램이 끝날 때까지 쭉 끌고 갈 수 있어요. 그런데 그게 안 된 거죠.”
-그 일로 뭘 배웠나요.
“레이첼은 내가 하기에 적합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제안이 들어왔을 때 거절하지 못했죠. 제가 원래 ‘노’를 잘 못하는 성격이에요. PD가 원하니까 그만큼 최선을 다하려고 했는데, 감기까지 걸려버린 거죠. 방송 끝나고 나서 선배 언니가 저한테 그러더라고요. ‘혜정아, 너 레이첼은 아니었어.’ 맞는 말이었죠. 지금 같으면 거절하고 그에 적합한 인물을 추천할 텐데, 그때는 그걸 못한 거예요. 그 사건으로 거절해야 할 땐 거절하자고, 일을 할 땐 냉정하자고 결심했죠.”
당시 KBS는 성우의 전속 계약 기간이 6년이었다. 이후 그는 프리랜서로 활동 폭을 넓히고 수입도 억대 연봉 수준으로 늘었다.
-잘나가던 시기에 사업을 시작했다가 낭패를 봤죠.
“2002년 오디오북 회사를 만들었어요. 내 돈으로. 난 정말 잘 될 거라고 확신을 했거든요. 그랬다가 성우로 모은 돈을 다 날렸죠. 아파트 한 채 값은 될 거예요. 아직도 여파가 있죠.”
-굳이 사업을 하지 않아도 됐을 것 같은데 왜 일을 벌였나요.
“안주하는 스타일이 아니에요. 말로 살아온 경력을 사업으로 확장하고 싶더라고요. 그래서 오디오북을 만든 거죠. 아주 잘 만들었는데, 거기까지였어요. 홍보나 유통을 잘 못한 거죠. 너무 시대를 앞서가기도 했고요.”
집도 날리고 차도 날렸다. 그래도 하늘이 무심하지 않았다. 그때 tvN ‘재밌는 TV 롤러코스터’의 코너 ‘남녀탐구생활’의 내레이션 제안이 들어온 거다.
-제안을 받고 잘 될 줄 알았나요.
“아뇨. 처음에는 안 한다고 했어요. ‘나 서혜정이야. 나보고 무슨 케이블 채널을 하래’ 했죠. 하하. 케이블 채널 시청률이 1%도 안 나올 때였거든요.”
그의 것이 될 운명이었는지 결국 수락했다. ‘남녀탐구생활’은 당시 tvN의 야심작. 모든 게 새로웠다. 여성과 남성의 차이를 상황극으로 표현하는데, 사실상 주인공은 내레이터였다. 내레이터는 해설뿐 아니라 등장인물들의 독백 같은 연기까지 해야 했다.
-당시 PD의 요구는 뭐였나요.
“이런 거예요. ‘기계음 같은데 기계도, 사람도 아닌 음성이다. 감정은 없어야 하지만 시니컬함이 10원어치만 들어가면 좋겠다.’ 이게 무슨 소리야. 하하하. 그 콘셉트를 잡는 데 한 달은 걸렸을 거예요. 그리고 녹음에 들어갔는데 그림(화면)을 안 주는 거예요. 없대요. 이 프로는 내레이션이 주인공이라서 내레이션부터 한 다음에 그걸 틀어두고 연기자들이 연기를 할 거라는 거예요. 성우는 원래 그림을 보고 그 흐름을 타면서 하는 작업인데, 아무것도 없이 한 건 처음이었죠. 게다가 대사엔 모르는 말이 왜 그렇게 많은지. 예를 들면, ‘이런 된장, 쌈장, 고추장’ ‘이런 시베리안허스키’ ‘오마이갓김치’ 이런 식이었으니까. 하하. 한번은 웃음이 터진 뒤에 그치질 않아서 녹음을 못한 적도 있다니까요.”
녹음 현장부터 웃음보가 터지니 잘 되지 않을 수 없다. ‘남녀탐구생활’은 당시 케이블 채널의 새 역사를 썼다. 2%만 돼도 ‘대박’ 평가를 받던 시절, 최고 시청률이 5%까지 치솟았다. ‘성우 서혜정’의 인기도 새로운 장으로 접어들었다.
-‘남녀탐구생활’ 인기 비결은 독특한 내레이션이죠.
“대한민국에 미디어가 그렇게 많은 줄 그때 처음 알았어요. 1년간 매체란 매체의 인터뷰는 다 한 것 같아요. 코미디 배우들은 참 행복하겠다 싶더라고요. 웃으면 복이 온다는 말에도 공감했죠. 큰 사랑을 받았으니까요. 사업 실패 이후 제게 찾아온 큰 선물 같은 프로죠.”
-2019년 ‘서혜정낭독연구소’를 만든 이유는 뭔가요.
“우연히 한 북클럽 초청으로 화상회의 프로그램 줌(Zoom)으로 낭독 특강을 했는데 반응이 좋더라고요. ‘낭독 수업을 해볼까’ 싶어서 클래스를 시작했는데, 호응이 있더라고요. 그렇게 알음알음으로 수업을 원하는 사람들이 모여들었죠. 지금은 다른 성우 다섯 명과 함께 프로그램을 운영해요.”
-왜 낭독인가요.
“사업 망하고 차도, 집도 없이 빚 갚으면서 살 때 가난했던 어린 시절이 떠오르더라고요. 어느 날 집에 혼자 있다가 낭독을 하기 시작했어요. 일반 책부터 성경까지. 생각해 보니 나는 성우로서 누리기만 했지 나누지 못했더라고요. 다른 이들의 꿈을 이루는 데 도움이 돼보자는 생각이 들었죠.”
-낭독에 어떤 힘이 있나요.
“어린 시절 그 작은 천막집에서 소리 내어 낭독할 때, 내 목소리의 울림이 다시 내 귀로 들어오면 위안이 됐거든요. 나 혼자 있었지만 외롭지 않았고, 갑자기 가난해져서 위축됐던 마음이 서서히 없어지면서 자신감도 생겼죠. 다시 낭독을 하면서 그런 변화가 생겼어요. 낭독하는 건 텍스트지만, 결국 내가 나를 만나는 시간이에요. 텍스트를 매개로 내가 내 영혼과 대화를 하는 거죠.”
-부수적인 효과도 있을 것 같아요.
“책 내용을 제대로 파악할 수 있죠. 게다가 낭독을 하면 뇌가 활성화해 기억력이 좋아져요. 집중력이 향상되고 발음도 정확해지죠. 복식호흡이 절로 되면서 에너지를 쓰니까 뱃살도 빠진답니다. 낭독은 백익무해예요. 하하.”
-21년 전엔 상업적 목적으로 사업을 한 거라면 지금은 결이 다르네요.
“그때는 욕심이었고 지금은 사명감이죠. 성우 시험 평균 경쟁률이 400대 1이에요. 10명을 선발한다고 치면, 나머지 3,990명은 꿈을 이루지 못한 거잖아요. 그들이 성우는 되지 못했더라도 음성으로 할 수 있는 다른 길을 여는 데 도움이 되고 싶어요. 오디오북 세상이 열렸으니 북내레이터를 할 수도 있고요.”
-전문 성우의 북내레이션과 일반인의 북내레이션에 차이가 있나요.
“성우가 하는 북내레이션이 무조건 좋은 게 아니에요. 오히려 너무 유려해 뇌리에 성우 목소리만 남기도 하죠. 발음과 발성이 좋으면서 책을 사랑하는 일반인 북내레이터의 오디오북이 더 잘 이해될 수 있어요. 앞으로는 오디오북 하나에 여러 버전의 북내레이션이 생기는 시대가 올지도 몰라요. 독자가 취향에 따라 선택할 수 있도록.”
-꿈이 있나요.
“해외 한국어학당과 연계해 한국어 낭독을 가르치는 프로그램을 해보려고 해요. K드라마, K팝에 이어 K낭독의 시대도 오지 않을까요. 낭독 바람이 불었으면 좋겠어요.”
-‘실패’라는 단어를 성우 서혜정만의 언어로 정의해본다면 무엇일까요.
“실패란 다시 시작하는 것. 그러니 실패를 많이 해야죠.”
-실패의 경험들로 얻은 ‘삶의 도’는 뭔가요.
“사람이 살아가는 데 많은 것이 필요하지 않다는 것. 이 땅에 떨어질 때 갖고 온 각자의 소명이 있을 거예요. 그 사명을 다하고 별나라로 돌아가면 되는 거죠. 나도 실패하기 전까지는 내가 주인공이고 나만 돋보여야 했어요. 그러나 지금은 내가 쌓은 경험으로 다른 사람들이 빛났으면 좋겠어요. 나는 그간 충분히 빛났잖아요. 내가 없어지니 삶이 참 편안해요.”
그에게 실패는 귀로(歸路)였다. 초심의 자신에게로 돌아가는. 그의 얼굴에 선인(仙人)의 미소가 스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