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 신안군에 있는 섬 ‘옥도’의 행정명칭은 ‘신안군 하의면 옥도리’다. 하의면은 김대중 전 대통령이 태어난 하의도를 본섬으로 옥도, 신도 등 9개의 유인도와 47개의 무인도로 이뤄져 있다. 옥도의 면적은 여의도(2.9㎢)의 1.6배가 조금 넘는 4.76㎢이다. 하의도의 10분의 1에 불과하다.
그런데도 하의도 주민들은 예전부터 옥도 주민들을 부러워했다. 과거 외지인들이 먼저 주목한 곳도 본섬 하의도가 아닌 부속섬 옥도다. 전라도 서남권의 중심지 목포시가 개항된 1897년보다 3년 앞선 1894년부터 이미 옥도엔 많은 일본인이 드나들며 북적거렸다. 옥도는 일제강점기 때 일본 해군의 요충지로 활용돼 국내 최초로 무선전신 시설이 생겼고, 근대적인 기상 관측도 가장 먼저 시작됐다. 전체 해안선 길이 16㎞, 섬 한 바퀴를 도는 데 자동차도 아니고 걸어서 2시간이면 족한 작은 섬은 어떻게 모두의 부러움을 사게 된 걸까. 그 답을 찾기 위해 지난 17일 섬으로 향하는 배에 몸을 실었다.
배가 부두에 닿기 전, 인터넷을 검색해 위성사진으로 본 옥도는 섬치곤 의외로 농경지가 많았다. 눈으로 본 옥도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섬 면적 5분의 2가량이 논으로, 하나같이 직사각형으로 반듯하게 경지정리까지 돼 있었다. 신안군의 섬들이 대체로 산과 바위, 해수욕장으로 이뤄진 것과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비결은 물이었다. 옥도 주민들은 대부분의 섬들이 용수 확보에 어려움을 겪는 것과 달리, 물 걱정을 거의 해 본 적이 없다. 신안군에 있는 1,000여 개의 섬이 가뭄에 허덕여도 이곳에선 딴 세상 얘기였다. 섬마다 식수가 바닥날 정도로 가뭄이 심한 해에는 모섬 하의도는 물론이고 멀리 다른 섬 주민까지 배를 타고 와 물을 받아 갔다. 그렇게 퍼줘도 다시 솟았다. 더구나 대개 섬들이 땅을 파도 짠 바닷물이나 수질이 나쁜 물이 나오지만, 이곳 지하수는 늘 맑고 깨끗했다. 오죽하면 ‘옥로수’라는 이름이 붙을 정도였다.
섬 곳곳에서 만난 주민들도 옥도의 자랑거리로 어김없이 물을 꼽았다. 송승학 신안군 옥도출장소장은 “하의도만 해도 관정(둥글게 판 우물)을 파면 10곳 중 한 곳이 성공할까 말까인데, 옥도는 10곳을 파면 9곳이 성공한다”며 “땅 아래 지하수를 저장하는 큰 웅덩이가 있는지, 물이 많아 신기할 정도”라고 말했다.
다음으로 옥도의 특이한 점은 지형이다. 총 세 개의 산 중 가장 높은 망마산의 해발은 106.8m밖에 되지 않고, 경사 또한 완만하다. 짓제산과 갈머리산 등 나머지 2개 산도 마찬가지다. 섬 전체가 구릉과 평지 형태여서, 바닷물이 빠지면 어디에 있어도 곧장 갯벌로 뛰어들 수 있다. 나지막한 지형 덕에 여덟 곳에서 동시에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갈 수 있다고 해, 옥도는 ‘팔구포(八口浦)’라 불리기도 했다.
섬의 한가운데는 마치 누군가 한 입 베어 문 듯 움푹 들어간 옥도항이 있다. 항구 양옆은 망마산과 짓제산이 우뚝 솟아 자연스럽게 바람과 파도를 막는 방파제 역할을 한다. 일본 해군이 서해의 무수한 섬을 뒤로하고 작은 섬 옥도를 기지로 삼은 이유도 풍부한 물과 경사가 완만한 지형, 천혜의 항구에 있었다. 지금도 섬에는 당시 일본인들이 풍족한 물을 받아 사용한 돌로 된 목욕탕이 남아 있다. 또 해군기지로 이용되면서, 옥도는 국내 최초 무선전신 시설이 도입되고 근대 기상관측 장비가 가장 먼저 설치된 곳이라는 기록을 얻게 됐다.
일본인들이 머물러 일찍부터 최신 문물을 접할 수 있었던 옥도 주민들은 상당수 일본으로 건너갔다. 고생 끝에 일본에서 많은 돈을 번 몇몇 향우들은 뜻을 모아 장학회를 결성한 뒤, 작은 학교를 세웠다. ‘후대만큼은 돈을 들여서라도 가르쳐 발전한 일본처럼 잘 살도록 하자’는 각오였다.
마을 최고령 송성태(94)씨는 “장학회에서 교사를 구하기 위해 집은 당연하고 논이랑 밭까지 내줬다”며 “학교가 생긴 덕에 멀리 목포까지 갈 수 없는 근처 섬 아이들도 옥도에 와 공부를 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해방 후 6ㆍ25전쟁을 거쳐 도시화와 산업화가 빠르게 이뤄지면서 되레 옥도는 주변 큰 섬들에 밀려 뒤처지기 시작했다. 젊은 세대들은 앞서 개발돼 발전하는 육지로 하나둘 떠났다. 한때 600명에 육박했던 인구도 자꾸만 줄어들었다.
지난달 말 신안군청이 집계한 옥도의 주민등록인구는 총 36가구, 65명이다. 불과 10년 전만 해도 61가구에 128명이었던 것과 비교하면, 절반으로 줄어든 셈이다.
섬의 유일한 교육기관인 하의초등학교 옥도분교는 25년 전 문을 닫았다. 공공기관으로는 파출소보다 작은 치안센터가 있어 경찰관 1명이 근무하고 있다. 소방 공무원은 단 한 명도 상주하지 않아 큰불이 나면 주민들이 꺼야 한다. 옥도에는 지금까지 총 세 번의 큰 산불이 났는데, 그때마다 주민들은 양동이에 물을 받아 수백 번 산을 오르내리며 불을 껐다.
옥도 주민들의 가장 큰 걱정거리는 여느 섬 주민들처럼 ‘의료’다. 섬의 유일한 의료시설 옥도보건진료소에는 의사가 아닌 간호사 1명이 주 5일 근무한다. 학교의 양호선생님처럼 응급환자 발생 때 이송 가능한 육지 병원을 찾는 업무 등을 처리하지만, 주민들에게는 감지덕지다. 지난해 옛 옥도발전소 자리에 들어선 하의면 옥도출장소도 주민들에게 도움이 되고 있다. 한 주민은 “행정서류 한 통을 떼려고 해도 면사무소가 있는 하의도까지 배를 타고 나가야 했는데 출장소가 생겨 큰 고충을 덜었다”고 말했다.
물이 풍부해 농경지가 많은 섬이지만, 그렇다고 해도 키운 곡식을 내다 팔 정도까진 되지 않는다. 주민 대부분은 바다 위에 기둥을 꽂고 그물망을 펼쳐 묶는 지주식 방식의 김 양식으로 생계를 유지하고 있다. 7, 8월은 김이 자라지 않는 시기인데도 어민들은 그물이 달린 발을 손보느라 분주한 모습이었다.
주민 김수영(62)씨는 “해마다 9월 중순쯤 기둥에 그물망을 묶기 때문에 여름 내 발을 손질한다”며 “옥도김은 손이 많이 가지만 햇빛을 고루 받고 갯병이 거의 없는 지주식으로 양식해 맛이 좋고 영양이 풍부하다”고 말했다.
일본인들까지 북적거리던 옥도는 이제 사람 귀한 섬이 됐다. 인구가 줄면서 남은 주민들이 감당해야 할 몫도 점점 커졌다. 그래서인지 대부분 주민이 ‘일당백’이 됐다. 송주현 옥도리 이장은 마을 내 처리해야 할 중요한 일들을 살뜰히 챙기는 것도 모자라 하루 두 번 옥도항에 여객선이 들어올 때면 마을버스 기사로 변신해 승합차를 몰고 나가 섬 곳곳을 누빈다. 최고령 송성태씨도 예외가 아니다. 그는 골프장에서 운명을 다한 낡은 전동카트를 몰며 날마다 보건진료소 앞 마당을 청소하고 골목 구석구석을 다니며 주민들의 무거운 짐을 날라 준다. 김 공장 사장이던 송하성씨는 과거 일본인들이 설치한 근대 관측장비 대신 최신식 국내 기술로 무장한 무인기상관측소를 관리한다.
옥도는 여산(옛 전북 익산) 송씨의 집성촌으로, 65명의 주민들이 동네 이웃이면서 한 집안 친족이라 화합이 잘 된다. 덕분에 2년 전 하나도 선정되기 어려운 섬 개발 사업 3개를 한꺼번에 따냈다. 국토교통부가 주거환경이 열악한 지역의 생활환경을 개선해 주는 ‘새뜰마을사업’과 해양수산부가 추진하는 어촌 현대화 사업인 ‘뉴딜300’, 전남도가 24개 섬만 골라 관광개발을 지원해 주는 ‘가고 싶은 섬’에 선정된 것이다.
옥도 주민들은 이미 협동조합을 결성하고 모처럼 온 기회에 각오를 단단히 한 상태다. 신안군이 추진하는 ‘사계절 꽃 피는 사업’에 맞춰 옥도항 옆 산 중턱에는 빼곡히 작약꽃을 심었고, 오고 싶은 섬을 만들기 위해 집집마다 지붕을 섬의 상징 색인 새빨간 페인트로 칠했다.
주민들의 가장 큰 바람은 대합실 등 기반시설이 열악한 옥도항을 깨끗이 정비하고 여객선으로 2시간이 걸리는 목포항 대신 5분이면 닿는 안좌도 우목항까지 마을 주민과 관광객이 타고 다닐 수 있는 작은 배를 건조하는 것이다. 하지만 3개 사업 모두 당초 계획대로 사업비가 제때 집행되지 않고, 건설 자재비가 급등하면서 주민들 시름이 깊어지고 있다. 송 이장은 “배 한 척만 제대로 지어도 의료 등 여러 문제가 한꺼번에 해결될 텐데 자꾸 늦어져 모두 답답해하고 있다”며 “어렵게 따낸 사업들이 잘 추진될 수 있도록 이제라도 관련 정부부처나 전남도에서 관심을 갖고 지원해 주면 더는 바랄 게 없겠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