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곤·차별 맞서 싸우다 팔순 넘어 평화... 재일동포 1세 할머니들의 삶

입력
2023.08.21 0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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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랑 랩소디: 바다를 건넌 할머니들’
재일동포 김성웅 감독 인터뷰

“꿈이 뭐냐고? 에이, 이 나이에 꿈이 어디 있어. 난 지금이 제일 좋아.”

다큐멘터리 영화 ‘아리랑 랩소디: 바다를 건넌 할머니들’은 장구 소리에 맞춰 춤을 추고 노래하는 할머니들의 모습을 비추며 시작한다. 일본 가나가와현 가와사키시의 재일동포 집단 거주 지역인 ‘사쿠라모토’에 거주하는 재일동포 1세들이다.

오사카의 코리아타운 쓰루하시 출신의 재일동포 2세 김성웅(60) 감독은 1999년부터 20여 년간 사쿠라모토의 할머니들을 촬영해 ‘아리랑 랩소디’를 제작했다. 올해 겨울 개봉을 앞두고 지난 15일 가와사키시 자치회관에서 열린 시민 상영회가 끝난 후 김 감독을 만났다.

김 감독은 영화를 통해 “할머니들이 많은 고난을 겪었지만 꿋꿋이 살아온 그들의 인생은 풍요로웠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고 밝혔다. 영화엔 할머니들이 힘들었던 과거를 회상하며 눈물짓는 모습뿐 아니라 ‘고향의 봄’과 ‘아리랑’을 부르며 활짝 웃는 모습도 많이 등장한다.

대부분 80대와 90대인 할머니들은 거동이 불편해 외출할 때 휠체어를 이용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도 ‘우리마당’이라는 학습 모임에 매주 나가 글을 배우고, ‘도라지회’라는 교류 모임에서 함께 식사를 하고 노래도 하고 춤도 춘다. 가와사키시가 설립한 재일동포 평생교육기관 ‘후레아이관’이 지원하고 자원봉사자들도 할머니들을 돕는다. 김 감독은 “할머니들은 80세가 되기 전까지 계속 일했다”며 “이제야 노래도 하고 춤도 출 시간이 생긴 것”이라고 말했다. 식민지 시절 일본으로 이주해 극심한 빈곤과 차별을 견디며 투쟁하며 살아 온 이들이 팔순을 넘어서야 평화를 찾은 것이다.


할머니들, '차별 반대' 시위도

영화는 할머니들의 활동을 통해 일본의 재일동포 차별 문제와 한일 과거사 문제도 조명한다. 2015년 이후 일본 우익의 혐한 시위가 심해지자 할머니들은 이를 규탄하는 시위에 나서 ‘차별 반대’를 외친다. 일본 정부는 이듬해 혐오 발언을 규제하는 ‘헤이트 스피치 해소법’을 만들었다. 가와사키시에선 2020년 혐오 표현 금지 조례를 제정했다. 그럼에도 일본 우익 단체는 "(재일교포들은) 한반도로 돌아가라"며 혐오 시위를 벌이고 있다.

영화 속에서 사쿠라모토의 할머니들은 강제동원으로 희생된 조선인을 기리는 위령비를 찾아갔다가 재일동포 1세인 서순화 할머니를 만난다. 서 할머니의 남편은 납치당하듯이 강제로 일본에 끌려가 군수공장에서 일했다. 파병된 그는 총에 맞아 일본으로 이송됐다가 숨졌다. 서 할머니는 “일본이 (북한에 의한 일본인) 납치 문제를 항상 얘기하지만, 자기들도 그런 짓을 했다”며 눈물을 흘렸다.

일본 정부는 여전히 조선인 강제 연행을 부인한다. 김 감독은 “일본은 강제 연행을 비롯한 가해의 역사를 인정하지 않으려 하고 오히려 없었던 일로 하려고 한다”며 “그런 일본의 태도가 지금의 인권, 젠더, 차별 문제의 뿌리가 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일본 사회는 아직 이 문제를 직설적으로 논의할 수 있을 정도로 성숙하지 않았다”면서 "창작자들이 지혜를 모아 조금씩 생각을 바꿔야 하며, 내 영화도 그런 계기가 됐으면 한다”고 말했다.

"부산영화제에서 할머니들과 레드카펫 밟았으면"


김 감독은 다큐멘터리 영화 ‘옥우(獄友)’(2018년), ‘사쿠라이 쇼지씨의 어떤 기념일’(2022년) 등으로 마이니치 영화상과 고엔지다큐멘터리 영화제 경쟁부문 대상 등을 수상했다. ‘아리랑 랩소디’는 올가을 부산영화제에 출품했으며, 할머니들과 함께 레드카펫 위를 걸어볼 수 있기를 바라고 있다.

도쿄= 최진주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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