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때 달력에서 '입추(立秋)'가 쓰여 있는 걸 보며, 한창 더운데 왜 입추라는 건가 생각한 적이 있다. 매년 8월 7일이나 8일에 오는 입추는 무더운 말복과 같은 날일 때도 있다. 태양의 움직임(황도)에 따라 1년을 24개로 나눈 24절기 중 우리나라에서 실제로 가을의 시작이라고 느끼는 것은 입추가 아닌 '처서(處暑)'일 것이다.
다음 주면 24절기 중 열네 번째 절기인 '처서'가 온다. '더위가 그친다'라는 뜻인 처서는 '땅에서는 귀뚜라미 등에 업혀 오고, 하늘에서는 뭉게구름 타고 온다'고 했다. 처서면 여름이 가고 가을이 온다는 것을 표현한 말이다. 처서가 지나면 선선한 바람이 불고 온도가 내려가, 모기도 처서가 지나면 입이 삐뚤어진다고 한다. 모기는 가고 귀뚜라미는 하나둘 나오는 시기이다.
이 시기 농촌에서는 한창 벼가 패고 작물이 무르익는다. 그래서 무엇이 한꺼번에 성하거나 사방에서 요란히 나타나는 것을 말할 때 '처서에 장벼(이삭이 팰 정도로 다 자란 벼) 패듯'이라고 한다. 그러니 이때는 해는 쨍쨍하되 비가 오면 안 된다. 처서에 비가 오면 흉작이 들어 독 안에 든 쌀이 줄어든다고 했다.
절기가 농경 사회에서만 존재감이 있었던 게 아닌가 싶지만, 그렇지 않다. 절기에 따라 날씨가 달라지는 걸 느끼는 요즘 사람들은 처서가 지나면 거짓말처럼 더위가 가시는 걸 보고 '처서 매직(magic)'이라는 말을 만들어냈다. 옛 조상들의 지혜가 담겨 있는 절기가 들어맞는 것이 마법처럼 여겨진 것이다.
유난히 길게 느껴지는 올여름, 처서가 지나면 가을이 오기를 바라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