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약과의 전쟁’ 선언한 에콰도르 야당 대선 후보, 유세장서 총격에 사망

입력
2023.08.10 1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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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범죄 조직 결탁 비판하다 암살
“마약 조직의 협박 있었다” 주장도
‘마약 통로’ 된 에콰도르 비극 반복

에콰도르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는 야당 후보가 9일(현지시간) 유세장에서 괴한의 총격으로 암살됐다. 대선 1차 투표(8월 20일)를 불과 11일 앞두고 벌어진 충격적 사건이다. 언론인 출신으로 정부와 범죄 조직의 결탁을 가장 날카롭게 비판해 온 인물이라는 점에서도 심상치 않다. 남미에서 비교적 평화로운 편이었던, 그러나 최근 ‘마약 사업 중심지’로 떠오르며 비상사태까지 선포된 에콰도르의 국가적 위기를 선명히 보여 준 비극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오토바이 괴한이 '무차별 총격'... 검찰 "6명 체포"

영국 로이터통신과 미국 뉴욕타임스(NYT) 등은 에콰도르 야당 ‘건설운동’의 대선 후보인 페르난도 비야비센시오(59)가 이날 오후 6시 20분쯤 수도 키토에서 선거 유세를 마친 뒤 차량에 탑승하자마자 오토바이를 탄 괴한으로부터 무차별 총격을 받았다고 보도했다. 비야비센시오는 즉시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결국 숨졌으며, 머리 3곳에 총상을 입은 것으로 알려졌다. 국회의원 후보 1명과 경찰관 2명을 포함, 9명의 부상자도 나왔다.

암살 동기나 배후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총격범은 보안 요원들과의 교전 끝에 중상을 입고 체포됐으나 병원 이송 중 사망했다. 현지 매체 엘유니버소는 “용의자는 유세 현장에 쉽게 잠입하려 비야비센시오 지지자 깃발을 지니고 있었다”고 전했다. 검찰은 테러 사건으로 규정하고 수사에 착수했으며, 현재까지 6명을 체포했다고 밝혔다.

에콰도르는 횡령·배임 등 혐의로 탄핵 위기에 몰린 기예르모 라소 대통령이 임기를 절반가량 남기고 자진 퇴임 의사를 밝힘에 따라, 오는 20일 조기 대선(1차 투표)이 치러진다. 엘유니버소 등에서 기자로 일하다가 정부 부패를 폭로하는 활동가를 거쳐 국회의원까지 지낸 비야비센시오는 대선 공약으로 ‘범죄와의 전쟁’을 선언했다. 마약 밀매와 부패, 뇌물 수수 등을 막는 데 역점을 뒀다. 여론 조사에서 지지율이 대선 후보 8명 중 중위권에 머물렀지만, 최근엔 2위에 오르기도 했다.

영국 BBC방송은 비야비센시오가 몇 주 전 마약 밀수 조직으로부터 암살 협박을 받았다고 보도했다. 지지자들은 “당선 가능성이 커지자 살해당한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잇따르는 정치인 살해… 국가적 문제

에콰도르 치안은 엉망인 상태다. 세계 최대 코카인 생산국인 콜롬비아와 페루 사이에서 마약을 미국·유럽 등으로 내보내는 통로로 전락한 탓이다. 지난해 1년간 마약 압수 건과 살인 건수는 역대 최고 기록을 썼다.

정치인 피살 사건도 반복되고 있다. 지난달 말 아구스틴 인트리아고 만타시 시장이, 올해 2월엔 오마르 메넨데스 푸에르토 로페스시 시장 후보가 각각 살해됐다. 지역 검찰청사에 폭발물이 투척되는가 하면, 교도소들에선 폭동이 이어진다. 에콰도르 정부는 지난달 25일 국가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60일간 야간 통행금지령까지 내렸다.

NYT는 에콰도르의 정치 분석가인 라파엘 발다를 인용해 “비야비센시오 암살은 개별 사건이 아니라 ‘사회적 문제’에 가깝다”고 짚었다. 최근 몇 년 새 마약 밀매를 위한 ‘기회의 땅’이 돼 버린 에콰도르 현실이 빚은 비극이라는 얘기다.

전혼잎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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