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 AI 스타트업 러시, '좀비도시'를 깨우다...[AI가 되살린 샌프란시스코①]

입력
2023.08.12 04:30
1면
세계 AI 허브로 떠오른 샌프란시스코
AI 4대 스타트업 등 111곳 둥지
유치한 투자액은 전세계 절반 차지
"공동화로 위태롭던 도시에 새 활력"


'실리콘밸리의 관문'으로 통하는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제일 오래된 동네 중 하나인 미션 디스트릭트. 고층 빌딩이 빽빽한 도심 업무지구와 4㎞ 정도 떨어져 비교적 조용한 이 지역엔 바깥벽에 큼지막이 '개척자'(Pioneer)라고 적힌 건물이 있다. 120년이 넘는 역사를 자랑하지만 특별히 주목받을 일이 없었던 이곳은 지난해 말 갑자기 이 일대 최고 명소로 떠올랐다. 요즘 개척자 빌딩 앞은 '인증샷'을 남기려 부러 찾아오는 관광객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개척자란 이름처럼 생성형 인공지능(AI) 시대를 연 오픈AI의 본사가 입주해 있던 곳이다.

오픈AI는 올 초 근처 다른 빌딩으로 '조용히' 이사를 마쳤다. 기술 유출 등 우려로 오픈AI는 새 사옥의 정확한 주소를 비밀에 부치고 있는데 샌프란시스코 지역 언론 등에 따르면 총 4개 층, 약 5,500㎡(약 1,660평) 규모에 이른다고 한다. 지난해 말부터 사옥 확장 개조 공사에 들어간 비용만 1,100만 달러(약 144억 원) 정도인 것으로 알려진다. 최근 찾은 오픈AI 신사옥은 간판 하나 없고 출입문은 굳게 닫혀 있었지만 유리창을 통해 일부 보이는 내부 모습만으로도 이곳이 '세계에서 가장 주목받는 기업'의 새 일터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사망 진단은 이르다... AI 투자 몰리는 샌프란시스코


최근 수년 동안 샌프란시스코엔 '노숙자의 천국', '마약에 찌든 좀비들이 장악한 도시' 같은 불명예스러운 딱지가 붙었다. 치안 악화에 유명 백화점과 마트 등이 줄줄이 도심 철수를 선언했고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위기가 엔데믹으로 전환했음에도 시내 사무실 셋 중 하나는 여전히 비어 있다. 엑스(옛 트위터)·우버·에어비앤비 등 이름만 대면 알만한 테크기업들이 태동한 '혁신의 땅'은 이제 그 운명을 다했다는 평가까지 나왔다.

그러나 이 도시에 대한 사망 진단은 유보돼야 할 듯하다.

"'AI 붐'이 테크기업가들을 다시 샌프란시스코로 끌어들이고 있다." (뉴욕타임스)

"AI가 샌프란시스코의 기술 현장을 되살리고 있다." (워싱턴포스트)

"실리콘밸리는 이제 지나간 뉴스입니다. '세레브럴 밸리'(Cerebral Valley·뇌 밸리)에 온 것을 환영합니다." (포천)

최근 미국 주요 언론을 장식한 기사의 제목들이다.

11일 벤처캐피털 회사 NFX에 따르면, 미국 AI 회사 상위 스무 곳 중 11개가 샌프란시스코에 몰려 있다. 벤처투자 조사업체 피치북은 올 1분기 전 세계 AI 스타트업들이 받은 투자액의 절반을 샌프란시스코 소재 기업들이 유치했다고 밝혔다. 치안 악화, 도심 공동화로 정치 생명이 위태로웠던 런던 브리드 샌프란시스코 시장은 최근 "이 도시가 세계의 AI 수도"라고 자신 있게 선언했다. 죽어가는 듯했던 샌프란시스코가 AI 열풍으로 심폐소생하고 있는 것이다.


조용하지만 분명한... 챗GPT발 'AI 붐'


AI 붐은 특성상 겉으로 티가 나지 않는다. AI로 가능한 모든 것을 자동화하기 때문에 개발에 많은 인력과 커다란 사무 공간도 필요 없다. AI 개발은 보안이 생명이라 사옥도 가능한 한 눈에 띄지 않게 유지하는 경우가 많다. 실제로 샌프란시스코 도심에 있는 AI 스타트업 대부분은 사무실 밖에 간판을 달지 않고 있다.

하지만 잘 보이지 않는다 해서 존재하지 않는 건 아니다. 스마트폰 등장 이후 최대 혁명으로 불리는 AI 혁명의 중심에 바로 샌프란시스코가 있다. 지난 몇 년 동안 침체에 빠졌던 샌프란시스코 경제는 챗GPT 열풍 이후 조용하지만 분명하게 꿈틀대고 있다. 마이크로소프트(MS)에서만 100억 달러(약 13조1,550억 원)를 공개 투자받은 오픈AI를 비롯해 세계에서 가장 기업가치가 큰 상위 4개 AI 스타트업(오픈AI·앤스로픽·스케일AI·다이얼패드)이 샌프란시스코 시내에 둥지를 틀고 있다. 샌프란시스코를 근거지 삼은 AI 스타트업은 전 세계 500여 개(추정) AI 스타트업 중 5분의 1(111개)에 불과하지만 1분기 AI 스타트업들이 유치한 총 투자액의 절반을 차지했다.


젊은이 거리는 '뇌 밸리'로 탈바꿈

샌프란시스코에서 서울 강남구의 가로수길 같은 존재인 헤이스 밸리엔 올 들어 '세레브럴 밸리'란 새로운 이름이 생겼다. 트렌디한 상점과 음식점 등이 줄지어 젊은층 방문이 많은 이 거리에 해커하우스(창업자, 엔지니어, 연구원 등이 공동생활하는 공간) AI 관련 커뮤니티가 몰리며 붙은 별명이다. 헤이스 밸리엔 소속 회사와 무슨 일을 하는지 등만 밝히면 방을 임대해 주는 엔지니어 전용 셰어하우스들도 등장했다.

AI 이벤트 일정이 공유되는 세레브럴 밸리 웹사이트에 따르면, 11~17일 일주일 동안 샌프란시스코 일대에서 예정된 AI 해커톤(정해진 시간 내에 집중적으로 작업해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소프트웨어 이벤트), 콘퍼런스는 총 20개다. 하루 3개꼴로 AI 관련 이벤트가 열리는 셈이다. 6년 동안 샌프란시스코에서 각종 테크행사를 조직해 온 제니퍼 입은 "팬데믹 기간 조용했던 샌프란시스코 기술 현장이 지난해 말 시작된 AI 붐과 함께 달라지기 시작했다"며 "당일 공지한 야간 해커톤에 30여 명이 참석해 밤새 자기 아이디어를 나누는 것을 직접 보기도 했다"고 했다.

당국, AI 기업에 세제혜택 추진... 공실률 회복될까


도시가 활력을 되찾을 조짐을 보이면서 시 당국도 샌프란시스코를 AI 허브로 재탄생시키는 데 사활을 걸기 시작했다. 브리드 시장은 5월 한 AI 콘퍼런스에서 샌프란시스코를 '세계의 AI 수도'라고 칭하며 AI 기업들이 샌프란시스코로 모이고 있는 현상을 19세기 골드러시(Gold Rush)에 빗댔다. 시는 추세를 이어가기 위해 AI 스타트업에 대한 세금 인상 적용 시점을 2년 미루고 시내 건물을 임대하는 AI 회사를 대상으로 세금을 공제해 주는 내용의 세제혜택 도입을 추진 중이다.

팬데믹 기간 미국 최고 수준으로 높아진 샌프란시스코의 사무실 공실률도 회복의 불씨가 살아나고 있다. AI 스타트업 하이브 AI는 지난달 샌프란시스코 시내 건물 3개 층, 면적 약 5,300㎡의 공간을 전대(임차인이 다시 임대하는 것)했다고 블룸버그통신이 전했다. 부동산서비스업체 JLL의 북부 캘리포니아 담당자 알렉산더 퀸은 "10개 이상의 AI 회사가 샌프란시스코에서 총 7만4,320㎡ 규모의 사무실을 찾고 있다"고 블룸버그통신에 말했다.

실리콘밸리= 이서희 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