되찾은 지갑, 민망했던 의심

입력
2023.08.09 22:00
27면

"혹시 지갑 분실하셨어요?"

더웠던 오후 일과를 마치고 지친 몸으로 휴식을 취할 무렵, 핸드폰으로 문자가 왔다. 모르는 번호에 예상하지 못했던 문자. 순간 '스팸인가? 아니면 보이스피싱?'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무심히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그런데 잠시 후 왠지 찜찜한 마음이 들어서 지갑이 어디 있나 찾아보았다. 안 보인다. 음… 잠시 생각 후 문자를 남겼다. "혹시, 갈색 지갑인가요?"

‘드르르르’ 핸드폰이 진동하며 전화가 왔다. 지하 1층 주차장에서 지갑을 주웠다면서 보관함에 넣어 두겠다고 한다. 옷을 챙겨 입고 내려가 보니 말한 대로 내 지갑을 확인할 수 있었다. 집으로 돌아와 다시 문자를 남겼다. "고마워요. 없어진 줄도 모르고 있었는데 감사합니다." 문자를 남기고 '지갑 찾아주신 분'이라고 핸드폰에 번호를 저장했다. 내일이라도 SNS가 연결되면 작은 감사의 선물을 보내야겠다는 생각이었다.

최근 초등학교 교사의 자살, 분당 묻지마 폭행, 오송 침수 사건, 공기업의 아파트 공사 비리, 국제 잼버리 행사의 파행, 후쿠시마 원전 폐수 방류로 인한 갈등, 서울-양평 간 고속도로 노선 변경에 따른 정쟁 등 하루가 멀다 하고 마음을 불편하게 하는 사건ㆍ사고들이 연이어 터지고 있다. 40도에 육박하는 습한 더위와 함께 지치게 만드는 사건들이다. 뉴스를 보는 것이 두려울 정도인데 그 이유 중 하나는 항상 찬성과 반대 두 그룹의 패널들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양쪽 진영은 서로 자기가 옳다면서 ‘결론은 시청자가 내릴 것’이라고 주장한다. 나는 생각한다. 결론을 내가 판단해야 하는 거야? 왜 내가 이 논쟁에 참여해야 하는 걸까? 얼마나 많은 국민들이 이 판정에 참여해야 하는 걸까? 매스미디어에서 던져주는 이와 같은 질문은 일견 민주적이고 공정한 태도로 보이지만 사실상 국민을 둘로 갈라놓는 형국을 유도한다. 그리고 '네 편 내 편으로 갈라놓는 태도가 아닐까?'라는 이 논쟁 안에는 중도는 없고 화합도 없다. 어느 정도의 중재안도 없다. 중간은 존재할 수 없다.

건강한 도시 마을은 경제적 물리적 사회적인 관계가 서로 어울려 있는 마을이라고 이야기한다. 경제적으로 잘사는 사람도 있고 조금 덜한 사람도 있으며 어르신이나 사회적 약자와 건강한 청장년 아이들이 두루 어울려 있는 마을이 좋은 마을이라는 것이다. 그 마을에는 돌봄, 비전, 나눔과 같은 건강한 작동들이 나눠진다. 하지만 최근 도시의 삶의 구조는 이와 같은 유기적 섞임을 거부한다. 평형대별로, 브랜드별로 인간 삶은 구분된다. 경쟁주의식 교육방식은 함께라는 공동체의 중요성보다는 성공이라는 가치를 더 중요하게 여기는 사회를 만들었다. 그 결과 갈등은 더욱 첨예화된다. 성공한 자와 실패한 자의 구분이 암묵적으로 존재하는 사회다. 필요와 목적에 의해서만 모든 행위가 의미를 가지며 성공한 자와 실패한 자 간의 대화는 단절된다. 인간소외의 현상이 자본과 성장이라는 가치 속에 다시 살아나고 있다. 찰리 채플린의 모던타임스가 시사했던 인간의 기계화와 인간성 상실에 대한 경고가 다시 나타나는 것 같다. 사회적 관계로서의 인간의 삶을 영위할 권한을 빼앗긴 국민에게 행복권을 부활시켜야 한다.

지갑을 찾아주는 행동에 나는 왜 의심을 먼저 했을까? 감사를 떠나 의심해야 하는 삶은 결코 건강하거나 행복한 삶이 아니었다. 감사는 받은 사랑의 나눔이다.


김대석 건축출판사 상상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