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유’ 이병헌 “한 줄 줄거리만 듣고도 재미있겠다 생각”

입력
2023.08.08 1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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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난 그리나 인간의 무서움 다룬 영화
긴장감 속 피식 웃다가 서늘함 느끼게 돼"

빳빳한 머리칼에 야윈 얼굴이 낯설다. 물기와 온기가 다 빠져나간 얼굴이다. 소중한 뭔가를 잃은 듯한 얼굴엔 광기가 어려 있다. 영화 ‘콘크리트 유토피아’ 속 인물 영탁은 평범한 듯 평범하지 않다. 뜻하지 않은 일을 겪고, 어울리지 않게 큰 힘을 쓰게 된 소시민의 격정을 표현하기에 제격인 모습이다. 영탁을 연기한 배우 이병헌을 지난 1일 오후 서울 삼청동 한 카페에서 만났다.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서울에 대지진이 일어난 이후 홀로 무너지지 않은 황궁아파트를 중심으로 벌어지는 일을 그린다. 이병헌은 시나리오를 읽기 전부터 “큰 재난이 일어나고 아파트 하나만 남는다는 이야기만 듣고도 재미있겠다 생각했다”고 말했다. 그는 “설정 자체만으로 이야기의 많은 가능성이 열려 있어 어떤 내용이 펼쳐질까 궁금했다”고 덧붙였다.

영화는 재난을 지렛대로 보통 사람들의 숨은 악마성을 들춰낸다. 이병헌은 “절대 악이나 절대 선이 등장하지 않고 상식적인 선에서 인간들의 갈등과 인간성의 밑바닥을 보여준다”며 “‘나도 저럴 것 같다’는 생각이 무서움을 주는 영화”라고 출연작을 자평했다. “‘콘크리트 유토피아’가 재난 영화라고 많이들 얘기하지만 저는 이 영화에선 재난보다 더 무서운 건 인간이라고 봐요.”

영탁은 베일에 싸인 인물이다. 아파트 입주자들에게 말해선 안 되는 비밀을 지녔다. 정체가 밝혀지면 입주자 대표라는 권력도, 아파트 거주라는 특권도 잃게 된다. 영화는 영탁의 과거를 드러내는 장면을 이야기의 분기점으로 삼는다. 영탁이 노래방기계로 주민들 앞에서 노래 ‘아파트’를 부르며 어색한 춤을 추는 대목으로 이병헌의 연기력을 실감할 수 있다. 이병헌은 “리허설로 연기한 모습이 그대로 영화에 쓰였다”고 말했다. 실제 촬영을 위해 세 번가량 더 연기했으나 엄태화 감독은 리허설 모습을 활용했다. 이병헌은 “엄 감독님이 현장에서 말수가 워낙 적으나 자기 생각이 명확한 분”이라며 “리허설 장면을 쓴 것에서도 그의 면모를 알 수 있다”고 밝혔다.

이병헌은 지난해 ‘비상선언’에 이어 2년 연속 여름 시장 흥행에 도전한다. ‘비상선언’이 기대보다 못한 성적(205만 명)을 거뒀으니 흥행 부담감이 클 만도 하다. 하지만 그는 “어렸을 때는 아주 작은 일로도 일희일비했으나 이제는 (연기 인생) 전체 흐름에 크게 작용하지 않는 한 (어떤 결과에도) 만족하려 한다”고 말했다.

라제기 영화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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