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질 상무'(영화 '삼진그룹 영어토익반' 오태영 역·2020)부터 ' 불법 동영상을 유통하는 웹하드 회사 회장'(드라마 '모범택시' 박양진·2021) 그리고 '짝퉁 나훈아'(드라마 '나쁜 엄마' 백훈아·2023)까지.
백현진(51)은 이렇게 '괴랄'(괴이하고 X랄 맞다는 뜻의 인터넷 신조어)한 배역을 최근 잇따라 맡아 관객과 시청자의 눈도장을 받았다. 전형성을 부수는 'B급 캐릭터' 연기가 그의 전매특허. 지난 4일 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에서 만난 백현진은 "내가 톰 크루즈 같은 배우가 될 순 없잖나"라며 "('파고' '저수지의 개들' 등에 나온 미국 배우) 스티브 부세미처럼 영화에서 나쁘고 루저 같은 캐릭터를 연기하는 배우들에게 예전부터 관심이 많아 그 영향이 아닐까 싶다"고 말했다.
백현진은 9일 공개될 디즈니플러스 드라마 '무빙'에서 초능력을 숨기며 사는 인물로 등장해 '엉뚱하게' 퇴장한다. 그의 틀에 갇히지 않은 연기엔 비밀이 더 있다. 백현진은 드라마와 영화에서 배역의 대사를 그의 방식대로 쓰고 말한다. "제가 맡은 배역의 대사를 바꿔서 연기하는 것을 허락해 주는 작품에만 출연해요. 큰 틀에서 내용은 바꾸지 않지만 연기할 때 직관에 따른 즉흥성을 살리고 싶어서요."
즉흥성을 중시하는 그가 9월 1∼3일 세종문화회관 S씨어터에서 공연한다. 컨템포러리 시즌 '싱크넥스트23' 일환으로 기획된 '백현진 쑈: 공개방송'이다. 공연은 토크쇼, 낭송, 퍼포먼스, 음악 연주, 설치미술, 토막극 등 짧으면 2분, 길면 7∼8분에 이르는 20여 개의 쇼로 굴러간다. 경계를 허물고 예술의 다양한 장르를 아우른 말 그대로 '짬뽕쇼'다.
이런 기획은 그의 다양하고 화려한 창작 이력과도 맞닿아 있다. 백현진은 요즘 주목받는 배우이자 가수이며 현대미술가다. 박찬욱 감독은 백현진이 장영규와 1990년대 후반 함께 꾸린 인디 밴드 어어부프로젝트에 푹 빠져 '복수는 나의 것'(2002)에 그의 음악을 실었고, 설치미술가로서 그는 2017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올해의 작가상을 받았다. '짬뽕쇼'의 연출뿐 아니라 미술, 음악 감독까지 두루 맡은 백현진은 "이전엔 듣지도 보지도 못한 쇼가 될 것"이라고 했다.
그의 실험적 공연엔 소극장 공연에선 보기 어려운 문화계 유명 인사들이 여럿 동참한다. 배우 김고은은 독백으로 무대를 채우고, '응답하라 1988'로 친숙한 김선영은 악을 쓰며 연기한다. 한예리는 백현진이 만든 곡을 립싱크로 따라 부른다. 모두 백현진과 영화와 드라마에서 연을 맺은 인연들이다. 백현진은 "같은 동네(서울 연남동) 사람과도 같이 일을 해 보고 싶어 장기하도 섭외"했다. 유행에 발 빠른 '힙스터'들 사이 요즘 입소문을 타고 있는 음악 듀오 Y2K92 등 그의 이번 공연에 오르는 이들은 20여 명에 이른다. 공공극장(세종)의 적은 예산으로는 앞서 언급된 유명 배우 1명의 출연료도 제대로 주기 어렵다. 이 프로젝트가 성사될 수 있었던 건 동료들의 '품앗이' 정신 덕분이었다. "그림을 선물하기로 했어요. 제 그림이 싸진 않거든요. 물론 몇 년씩 그림을 못 주고 있는 분도 있긴 하지만요, 하하하."
공연을 준비하며 백현진이 골몰하는 화두는 문명이다. 그는 문명이 변화할 뿐 발전하는 게 아니라고 여긴다. 그래서 그는 '100만 유튜버' 문상훈과 문명을 주제로 공연에서 선보일 토크쇼를 준비하고 있다. 백현진은 "문명의 변화를 더 나은 것을 향한 위계의 개념으로 여기면서 사람들이 너무 힘들어지는 것 같다"고 말했다. 문명과 사람의 진보 대신 변화를 믿는 그는 올 하반기 전시와 영화 촬영 등을 이어가며 또 다른 변화를 꿈꾼다. 변화하는 삶을 적극 실천 중인 '문화계 프로 n잡러'인 그는 자신이 어떻게 불리기를 원할까. "'연남동 사는 72년생 쥐띠 미혼 아저씨'라고 불러 주세요. 전 '보이는 것, 들리는 것과 관계된 일을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있어 보이려거나 헛소리하는 게 아니라 현대미술가로 보이는 것, 음악가로 들리는 것, 배우로 보이는 것과 들리는 것으로 구성된 일을 하고 있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