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하고 싶다. 누구든 행복을 바란다. 그래서 돈 모아 건물 사고, 노력해서 좋은 기업에 취직하며, 지지고 볶아도 연애하고, 그리고 교회도 명상센터도 열심히 다닌다. 아무리 성경이나 명저가 인생에 대한 훈수를 두어도, 사람 대부분이 바라는 행복의 조건은 이거다. 고통 없이 안락한 조건을 갖추고 사는 것.
아이러니하게도 성경과 많은 명저는 이와 반대의 말을 한다. 성경은 말할 것도 없고, 하버드대 졸업생 814명을 몇십 년간 추적 조사하여 발간한 책 '행복의 조건'(Ageing Well)도 행복이란 '인생의 고통을 어떻게 대응하는가'에 달린 것으로 말한다. 다시 말하면, 결국 고통 없는 인생이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건물주가 되어도 신앙인이 되어도 고통 없는 안락한 삶은 절대 보장되지 않는다. 우리가 늘 상식적으로 바라는 그런 행복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성경의 욥이란 사람이 이런 명언을 남겼다.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화도 받지 아니하겠느냐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입술로 범죄하지 아니하니라."(욥 2:10) 하나님 잘 믿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울 사람의 입에서 나온 말이다. 그의 말에 의하면, 하나님 잘 믿어도 그분이 직접 고통을 주기도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애초에 안락한 복만 바라고 교회 다니기 시작했다면 크게 잘못된 길로 들어선 것이다. 열심히 바친 헌금만 아쉬워질 일이다.
욥은 하루아침에 사업이 몰락하고 자식들이 몰살했으며 자기도 병에 걸려 드러눕는다. 고통의 하이라이트는 그다음에 날아온 아내의 독설이었다. 옆에 와서 위로는커녕 차라리 하나님을 저주하고 죽으란다. 그러고는 욥의 위 명언이 탄생했다.
고통을 어떻게 대응하는가가 행복의 관건이라는데, 욥은 거의 해탈의 경지에 이른 듯한 말을 했다. 하지만 판단하기에는 이르다. 시간이 좀 지나자 욥은 하나님께 온갖 원망을 다 쏟아냈다. 고통도 운명처럼 받아들인다고 했지만, 사람의 머리는 자기 30㎝ 아래에 있는 가슴을 몰라도 한참을 모른다. 사실 욥도 우리와 똑같은 욕심을 가지고 하나님을 믿었던 것이다.
인생의 고통을 거의 겪어보지 않았을 것 같은 인물도 성경에 등장한다. 부와 명예, 여자를 원 없이 다 취해보았던 솔로몬 왕이다. 전도서는 전통적으로 그를 염두에 두고 읽는 책인데, 놀랍게도 그도 고통이 있다고 말한다. 허무였다. "그러나 내 손으로 성취한 모든 일과 이루려고 애쓴 나의 수고를 돌이켜 보니, 참으로 세상 모든 것이 헛되고, 바람을 잡으려는 것과 같고, 아무런 보람도 없는 것이었다."(전도서 2:11)
결국 인간은 그들이 바라는 물질적 조건에 만족한다고 하더라도 고통을 피할 길이 없다. 고통이 뚫고 들어올 공간은 인간에게 널찍하게 열려 있다. 인간은 배가 고파도 죽지만, 너무 먹어도 죽는다. 고통은 언제나 골목의 양 입구를 지키고 서 있고 우리는 도망갈 길이 없다. 잘 먹고 잘살아도 인생은 다음과 같단다. "그러니 산다는 것이 다 덧없는 것이다. 인생살이에 얽힌 일들이 나에게는 괴로움일 뿐이다. 모든 것이 바람을 잡으려는 것처럼 헛될 뿐이다."(전도서 2:17)
행복은 고통을 피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행복은 고통에 잘 대응하는 것이다. 성경도 고통을 부정하지 않으며 부정적인 것으로만 보지도 않는다. 심지어 이렇게 말한다. "상처가 나도록 때려야 악이 없어진다. 매는 사람의 속 깊은 곳까지 들어간다."(잠언 20:30) 고통은 피해야 할 것이 아니라 해석하고, 성찰하고, 소화해야 할 문제다.
욥기의 마지막 장에 이런 말이 나온다. "그의 모든 형제와 자매와 전부터 그를 아는 친구들이 다 그를 찾아와, 그의 집에서 그와 함께 기뻐하면서, 먹고 마셨다. 그들은 주님께서 그에게 내리신 그 모든 재앙을 생각하면서, 그를 동정하기도 하고, 또 위로하기도 하였다."(욥기 42:11) 이 구절은 욥에게 내린 재앙이 어디에서 온 것인지 밝히고 있다. 찾아보시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