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소음이 가득했던 서촌이 그립다면

입력
2023.08.03 1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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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속화와 함께 엿보는 그 시절의 정겨운 모습
신간 '서촌 그리는 마음'

전통적인 한옥 밀집지구와 트렌디한 맛집·카페·브랜드숍이 공존하는 오묘한 동네, 바로 서울 종로구의 서촌이다. 네 살 때 이사를 와 육군 입대 전까지 20년을 이곳에서 살았던 정광헌(71) 작가는 직접 그린 서촌의 풍속화와 회고담으로 시대의 기록을 남기기로 했다. 기억은 6·25 전쟁 직후로 거슬러 간다. 서울 토박이보다는 전국 곳곳에서 떠나온 이들이 모여들던 곳. 저자가 이곳에서 보낸 20년 동안 서촌은 어느새 이주민들의 제2의 고향이 돼 있었다.

서촌은 다사다난했던 한국 현대사의 중요한 무대이기도 하다. 단풍잎 채집 숙제를 하러 대수롭지 않게 지나다녔던 청와대 앞길은 1968년 북한 무장 공비의 청와대 기습 시도를 계기로 50여 년간 철저히 통제됐다. 지금의 청운파출소는 1961년 4·19 혁명 당시 청와대로 진입하려던 학생 시위대에 의해 앞문 유리가 산산조각이 난 궁정파출소 시절의 역사가 숨겨져 있다. 당시 여덟 살이었던 저자의 머릿속에는 '파괴된 파출소 출입문'으로만 남아있던 광경이다.

그 시대에만 겪을 수 있었던 소소한 추억거리는 노년 세대의 향수를 자극한다. 엄격했던 아버지가 밀가루 반죽에 단팥을 듬뿍 담아 찐빵을 쪄주신 일, 자동차 고장이 잦아 길거리 사방에 많은 이들이 수리를 위해 차 밑에 누워있던 광경, 창의문 밖의 능금밭과 자두밭을 서리하다가 어른들께 용서를 빈 기억 등 추억이 화수분처럼 쏟아진다. 이를 생생히 옮긴 저자의 그림은 삶의 소음이 가득했던, 공동체가 살아 숨쉬는 시대를 살았던 이들에게 그리움을 불러온다. 책에는 청계천으로까지 흐르던 서촌의 개울이 땅속으로 묻히고, 낯선 간판이 즐비해진 지금과는 사뭇 다른 정겨운 풍경이 그려진다.


최은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