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층아파트 보며 한숨... '악귀' 김은희 작가 옛 모습이었다

입력
2023.08.04 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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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귀 소재로 자살 뒤 '보이지 않는 손'... 청년 향한 '사회적 타살' 꼬집어
김은희 작가 "청년들이 힘들어하는 건 우리 기성세대 책임"
백성, 청년의 고단함에 집중한 작가
생활 어려웠던 보조작가 시절 떠올리며 '착한 임대 프로젝트' 실험

SBS 드라마 '악귀'에서 스스로 목을 매 숨진 이들의 양 손목엔 모두 시뻘건 멍이 들어 있다. 수사는 자살로 종결됐지만 모두 제 뜻대로 죽은 게 아니다. 악귀에 속수무책으로 제압당해 죽임을 당했다. 보이지 않는 힘(악귀)에 자살로 위장된 타살. '악귀'의 대본을 쓴 김은희 작가는 "자살한다는 게 그 사람이 잘못해서만은 아니고 누군가 혹은 무엇인가의 부추김, 다른 원인이 분명히 있었을 것이란 생각을 악귀로 표현해 보고 싶었다"고 말했다.


1030 사망원인 1위 '자살'... "보이지 않는 손 있어"

'악귀'는 민속 신앙을 소재로 억울하게 죽은 이들을 통해 어린이 살해 등 사회적 비극을 들춰 시청률 10%를 넘나들며 화제 속에 지난달 종방했다. 드라마에서 민속학자 염해상(오정세)은 한강대교를 바라보며 "자살 사건에는 보이지 않는 손이 있어"라고 말한다. 보이지 않는 손에 죽임 당한 이들의 가해자는 악귀뿐 아니라 '기성세대'이기도 하다.

극 중 '장한' 고시텔에선 학비를 장만하기 위해 불법 사채업자에 돈을 빌렸던 대학생들이 이자가 눈덩이처럼 불어난 탓에 빚 독촉에 협박당하다 목을 매고, 오른쪽 얼굴에 피멍이 든 고등학생 진욱은 학교 옥상에서 동급생들에게 "내가 죽으면 우리 집에 꼭 와 줘"라고 말한 뒤 스스로 뛰어내려 가정폭력을 죽음으로 고발한다. 통계청이 지난해 발표한 '2021 사망 원인 통계'에 따르면 10~30대 사망 원인 1위는 자살이다. "'어려웠던 시절 사람들은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발버둥 쳤는데 그때보다 훨씬 살기 좋아졌다는 지금 우리 청년들은 왜 죽으려 할까'라는 질문"('악귀' 제작 총괄 이옥규 스튜디오S 책임프로듀서)에서 출발해 김 작가는 악귀를 소재로 청년을 향한 사회적 타살을 고발했다. "기성세대는 살아왔던 인생을 스스로 책임져야 하는 거고 지금 청년들이 살기 힘든 사회를 만든 건 우리, 기성세대의 책임이라고 생각해요. 한창 아름다워야 할 청년들이 왜 이렇게 힘들어하는지를 기사 등을 통해 접하면서 마음이 아팠거든요." 김 작가의 말이다. '악귀'에선

마을 그리고 누군가의 부를 위해 아이들이 희생된다. "아이들의 죽음은 언제나 마음이 아프죠. 그 아이들에게 있었을 수많은 기회와 시간, 희망을 모두 빼앗긴 거잖아요. 그래서 (어려서 죽은) 태자귀와 염매 기록을 보고 드라마에 녹여보자 생각했죠."


고층 아파트 보며 한숨... 신혼 때 가스비도 제때 못 낸 작가

드라마에서 악귀에 씐 주인공 구산영(김태리)은 취업 준비를 하면서 대리운전으로 학비를 버는 공시생이다. 지하 셋방에 살며 산영과 함께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세미(양혜지)는 동네 반대편 우뚝 선 고층 아파트를 보며 이렇게 말한다. "저런데 살아도 힘든 일은 있겠지? 근데 힘든 일도 저런 데서 겪고 싶다. 그럼 좀 행복하게 불행할 수 있을 거 같아." 이 장면이 방송된 후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엔 '가난해 보지 않았으면 쓸 수 없는 대사 같아서 좋으면서 슬펐다' 등의 글이 올라왔다. 이 장면은 김 작가의 경험에서 나왔다.

"저도 어렸을 때 말 그대로 찢어지게 가난했었어요. 그때 살았던 곳이 서울 시내가 내려다보이는 인왕산이었죠. 사춘기 때 집에 들어가긴 싫고 주변을 배회하다 시내쪽의 불빛을 내려다보면서 그런 생각을 많이 했어요. 아마도 요즘 친구들도 저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겠지라는 생각으로 대사로 넣어봤습니다. 저도 그땐 청춘이었으니까요."

드라마 '싸인'(2011) '시그널'(2016) '킹덤' 시리즈(2019~2022) 등을 줄줄이 성공시키며 한국 스릴러의 간판 작가로 떠오르기 전까지 김 작가의 삶도 고단했다. 1998년 장항준 감독과 결혼한 김 작가는 신혼 초 도시가스비도 제때 못 냈다. "(가수) 윤종신이 쌀뿐만 아니라 세제 등 살림 물품을 사주며 도와주던 때"(장 감독)다. '악귀'에서 산영은 고등학교에서 다른 학생들이 농구를 하고 떠나면 그 운동장에 쭈그려 앉아 떨어진 동전을 줍는다. 김 작가는 농구 명문 휘문고 출신 남편한테 들은 그의 학창 시절 경험담을 '악귀'에 녹였다. '짠내' 나던 청년 시절을 통과한 김 작가는 그렇게 직·간접적으로 접한 '흙냄새' 나는 일상의 풍경과 문제의식을 차곡차곡 쌓아 서민의 절망을 다룬 드라마의 재료로 썼다. '악귀'를 비롯해 조선시대 백성의 굶주림을 좀비 드라마의 소재로 활용한 '킹덤' 시리즈가 그 사례다.


"그래 살아보자" 강남 아닌 은평구 '공동체 공간' 투자

백성과 청년의 고단함을 주제로 드라마를 쓴 작가는 현실에서도 공동체를 위한 공간에 투자했다. 2019년 서울 은평구 응암동에 세워진 '풍년빌라'와 2020년 같은 동네에 들어선 '여인숙'이다. 김 작가의 드라마 극본 데뷔작('위기일발 풍년빌라'·2010)과 이름이 같은 풍년빌라는 보증금 없이 월 45만~70만 원대의 임대료를 10년 동안 동결하는 조건으로, 여인숙도 보증금 없이 월 42만~60만 원 선의 임대료로 운영되고 있다. 4층으로 지어진 연면적 220㎡(총 67평) 규모의 풍년빌라엔 세 가구가, 5층으로 세워진 연면적 222㎡ 규모의 여인숙 3~5층엔 세 작가가 살고 있다. 부동산 업계에 따르면 응암동 일대 49㎡(약 15평) 기준 주택 월세가 55만 원(보증금 5,000만 원 기준)선. 주변 시세를 고려하면 김 작가의 건물 임대료는 저렴한 편이다. 김 작가는 생활이 어려웠던 보조 작가 시절을 떠올리며 후배 창작자들을 지원하자는 취지에서 '착한 임대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값싼 장기 임대로 공존의 대안을 보여준 김 작가는 '악귀' 마지막 회에서 산영의 입 등을 통해 "그래 살아보자" "잘하고 있어"라며 청춘을 응원한다. 김 작가는 "아름다운 분들에게 당신들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말해주고 싶었다"고 했다.

양승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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