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31일 오전 중국 베이징 차오양구의 한 영화관. 평일 오전인 데다 큰비까지 내렸지만 할리우드 영화 '바비' 상영관 앞은 북적였다. '장안삼만리' 등 함께 개봉한 중국 영화들에 홍보가 집중됐지만, 빗속을 뚫고 극장을 찾은 관람객 다수는 바비 상영관에서 쏟아져 나왔다. 대부분 10대, 20대 여성이었고, 딸의 손을 잡고 나온 여성들도 보였다. 바비를 상징하는 핑크색 옷을 입은 관객들이 눈에 띄었다.
"어떤 영화였냐"고 묻자 20대 여성 왕모(27)씨는 "여성의 삶에 대한 고정관념을 깨는 영화였다"고 말했다. 그는 "페미니즘 메시지를 담고 있는지는 모르겠다"면서도 "결혼해서 아이를 낳고 사는 게 여성의 당연한 삶이 아니라 나 자체로 내 삶은 충분할 수 있다는 의미를 던진 영화"라고 평가했다.
페미니즘 메시지를 담은 미국 영화 '바비' 상영관에 중국 관객들이 몰려들고 있다. 중국 온라인 티켓 판매 플랫폼인 마오옌에 따르면, 개봉 11일째인 이날 '바비'는 중국에서 1억8,300만 위안(약 325억8,000만 원)의 수익을 거둬들여 외국 영화로선 유일하게 5위권에 들었다. 극장별 '바비' 상영 횟수는 개봉 첫날인 7월 21일 9,600회에서 31일 약 2만6,000회로 급증했다. 중국 애국주의 영화에 늘 따라붙는 사전 홍보도, 배급사의 적극적인 지원도 없지만 관객들의 입소문이 흥행 바람을 일으켰다.
'바비'는 인형들만의 세상인 '바비랜드'를 떠난 바비가 인간 세상으로 나와 곳곳에 만연한 성차별을 목격하고 풍자하는 내용이다. 서방의 사상에 거부감이 강한 중국에선 페미니즘도 환영받지 못한다. 그런 중국에서 '바비'가 돌풍을 일으키는 이유에 대해 미국 페미니즘 작가 홍 핀처는 "여성들이 중국 사회가 불평등하고 여성혐오적이란 것을 깨닫기 시작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고 영국 파이낸셜타임스는 전했다.
중국의 성평등 수준은 바닥이다. 세계경제포럼(WEF)이 매년 발표하는 글로벌 성 격차 보고서에 따르면, 중국의 '성 격차 지수'는 2009년 60위로 한국(115위)이나 일본(75위)보다 높았다. 2018년에는 103위로 급락한 데 이어 올해에는 한국보다 아래인 107위로 내려앉았다. 여성 고위 정치인의 계보를 간신히 이어온 쑨춘란 부총리가 지난해 퇴임한 후 중국공산당 중앙정치국원 25명 중 여성은 한 명도 없는 현실이 이를 반영한다.
중국 '미투 운동' 선구자로 불리는 방송 작가 저우샤오쉬안은 홍콩 차이나모닝포스트(SCMP)에 "영화 관람은 누구도 막지 못하는 합법적 행위"라며 "모든' '바비' 상영관은 페미니즘을 위한 공간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페미니즘을 공개적으로 외치기 어려운 중국에서 '바비'가 성평등에 목마른 중국 여성들을 대변한다는 뜻이다. 2019년 중국에선 한국의 페미니즘 소설 '82년생 김지영'이 한한령 속에서도 소설 분야 온라인 구매 1위를 차지한 적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