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을 살릴 말들 담긴 시…AI도 시 번역은 쉽지 않아"

입력
2023.07.30 1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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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번역가 정은귀 교수, 산문집 2권 출간
'지금 여기' 이야기로 친근하게 풀어낸 시
"시심은 누구에게나 있어…시의 힘 믿어"
"AI 번역후기 쓸 수 없어, 번역가의 몫"

인터뷰 첫 질문도 전에 사랑 고백을 들었다. "저는 정말 시를 사랑해요." 순수한 그 고백이 허투루 들리지는 않았다. 시를 향한 헌신적 애정을 그의 글에서 먼저 충분히 느꼈던 까닭이다. 이달 산문집 2권을 연이어 발간한 영문학자이자 번역가 정은귀(54) 한국외국어대 영미문학문화학과 교수를 그의 연구실에서 만났다.

정은귀 교수는 영미권 시 번역의 대표 주자다. 이성복, 강은교, 심보선 등 한국 대표 시인들의 시집을 영어로 소개하는 일을 비롯해 노벨문학상 수상 시인인 루이즈 글릭, 윌리엄 칼로스 윌리엄스, 앤 섹스턴, 어맨다 고먼 등의 작품을 한국어로 번역하는 등 활발한 번역 활동을 하며 자신이 좋아하는 국내외 시에 대한 감상을 담은 칼럼을 2014년부터 월간 ‘경향잡지’(한국천주교주교회의 발행)에 연재하고 있다. 이번에 출간한 산문집 '다시 시작하는 경이로운 순간들'(민음사)과 '나를 기쁘게 하는 색깔'(마음산책)은 그 글들을 선별해 묶었다.

영문학자인 그는 이번 책들에 대해 "논문보다 애정이 깊다"고 표현했다. 그러면서 2014년 응급 수술을 앞두고 죽음을 떠올린 순간에도 남편에게 이 산문들을 책으로 남겨달라고 했다는 뒷 이야기를 전했다. "사람을 살리는 말을 쓰고 싶었다"는 그의 마음을 가장 진솔하게 담은 글이기 때문이다.

시가 무엇이길래 사람을 살릴 힘까지 있다는 걸까. 정 교수는 시를 '눈뜸'과 '회복'으로 정의했다. "언어가 빈곤한 사회는 병들기 쉽다"고 입을 뗀 그는 "시는 언어를 회복시켜주고 (독자를) 눈뜨게 해주는 소금 같은 존재"라고 힘주어 말했다. 어려운 장르라고 흔히들 생각하지만 "누구에게나 시심(詩心)은 있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그래서 자신의 안에 있는 시심을 펼쳐보지 못한 대중들을 시로 이끄는 이 글들이 소중하다. 이런 맥락에서 책에서는 유명 시인의 작품이 아닌 시도 소개했다. 서울시 시민대학 학생들과의 수업에서 '엄마는 ~이다'를 주제로 함께 지은 시 '엄마 이야기'로, 시가 놀이도 될 수 있다는 걸 말하고 싶었다. 또 팔순이 넘은 자신의 아버지가 지은 시 '무제'를 통해 전문가가 아니라도 좋은 시를 쓸 수 있다는 걸 보여주려 했다.

정 교수의 산문은 참 쉽고 편안하다. 그런데 술술 읽어가다 보면 묵직한 울림이 남는다. "지금 여기의 삶이 빠진 시나 문학 읽기는 의미가 없다"고 믿는 그는 시와 맞닿아 있는 우리 삶과 사회의 단면을 예리하게 포착해 우리 앞에 내보인다. 예컨대 김소연의 '학살의 일부1'를 통해 "사소한 사건에서부터 국가적 재난에 이르기까지 내 탓"을 사회구성원이 회피만 하고선 더 나은 사회로 나아갈 수 없음을 말한다. 교권이 추락한 시대에 초등교사의 자살, 폭우 속 구조 활동을 하던 해병대원의 사망 등을 떠올리며 더 깊이 시 세계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길을 독자에게 인도한다.

번역가의 시선이 빛나는 글들도 있다. "지금이 있다는 것보다 더 나은 시작이란 결코 없었고 / 지금이 있다는 것보다 더 나은 젊은이나 늙음도 없었다.(후략)" 월트 휠트먼의 '내 자아의 노래'에서 시인이 "지금보다(than now)"가 아니라 "지금이 있다는 것보다(than there is now)"라고 쓴 이유에 대한 해설이 대표적이다. "지금이 '있다'는 것, 그 조건을 더욱 강조"해서 궁극적으로는 "가장 공평한 생의 조건"에 대해 노래하고 있다고 그는 설명한다.

"인공지능(AI)이 번역 후기를 쓸 수는 없잖아요." 후학을 양성하는 번역가로서 AI 시대 업의 미래를 어떻게 전망하는지 묻자 돌아온 답은 명쾌했다. "번역가는 탐험가"라고 정 교수는 정의했다. 풍부한 의미를 담은 원문(시)의 세계를 탐험하려면 AI를 포함해 많은 도구를 활용하겠지만, 결국 단 하나의 길(최종 번역안)을 결정하는 건 번역가다. 고민 과정과 결정한 이유 등 번역의 여정을 '옮긴이의 말'로 풀 수 있는 건 결국 사람인 셈이다. 그래서 그의 탐험가로서 여정은 언제까지나 진행형일 테다.

진달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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