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사 법치주의는 이데올로기 과잉을 극복할 수 있을까

입력
2023.07.31 04:30
25면

편집자주

오래전부터 우리 사회 최대 숙제였지만, 이해관계 집단의 대치와 일부의 기득권 유지 행태로 지연과 미봉을 반복했던 노동·연금·교육개혁. 지속가능한 대한민국과 미래세대를 위해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3대 개혁>에 대한 진단과 해법을 모색한다.

노동개혁: <9> 노사법치주의 강화


단순 계약관계와 다른 노사관계
한국 특유의 역사 맥락도 중요
시민이 지지하는 법치 이뤄져야

'법치주의'. 그 심오한 학술적 개념에 대해 알 도리는 없다. 그래도 우리 헌법이 사람에 의한 지배(인치: 人治) 대신 법에 의한 지배(법치: 法治)를 지향하는 이유만큼은 분명해 보인다. 제아무리 힘 센 권력자라도 '법에 따라서만' 정당하게 권리를 행사해야 하는 게 법치다. '법에 근거가 없는 한' 타인의 자유와 권리를 함부로 침해할 수도 또한 없다. 덕분에 국민이라면 누구나 자신의 자유와 권리를 온전히 보장받게 된다. 법치는 국가존립의 토대이자, 헌법의 기본 정신이다. 노동 분야라고 해서 다를 리 없지만 '노동법치주의'라는 용어에는 미묘한 어색함이 묻어난다. 굳이 이유를 찾는다면 다음 두 가지 정도다.

우선 노사관계는 단순한 계약관계와는 결이 다르다. 양 당사자 사이에서 인격적 신뢰가 중요하게 여겨지는 '인간 관계'이자 '동반자 관계'이다. 노동문제를 법의 관점에서만 바라보거나, 평가하는 것에 신중해야 하는 이유다. 마치 부부나 친구, 가족 사이에서 문제가 생겼다고 해서 곧바로 법의 잣대를 들이댈 수는 없는 것과 같은 이치다. "법대로 하자"는 말이 나올 정도면 이미 서로 마음이 상할 대로 상해서, 인간관계로서의 실질이 소진되었다는 의미다.

다른 한편 역사적 맥락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우리나라 노동운동은 곧 민주화운동이기도 했다. 과거 권위주의 정치체제에서 벗어나 민주화 열기가 정점에 달하던 1980년 후반이 되어서야 그저 활자로만 머물던 노동법이 비로소 현장으로 다가갈 수 있었던 것도 결코 우연은 아니다. 때로 국가의 폭력에 맞서기 위한 폭력은 불가피했다. 노동기본권 쟁취라는 헌법적 대의 앞에서 수단의 불법성은 어느 정도 용인될 수 있었다. 법치를 강조하기에는 시대적 상황이 너무나 엄혹했던 셈이다. 아무리 그렇다고 하더라도 언제까지고 노동과 법치를 멀찌감치 떨어뜨려 놓을 수는 없다. 2023년 대한민국의 노동문제를 1987년 방식으로 풀어낼 수는 없기 때문이다. 노든 사든 마찬가지다.

아무리 노사 간 합의가 존중되고 우선되어야 한다지만, 담합을 통해 이익을 독점하는 것까지 허용할 수는 없다. 구직자의 취업기회를 박탈하거나 왜곡한다면 마땅히 법이 먼저 나서서 규제해야 한다. 정규직 노사가 비정규직에 대한 차별을 초래하거나 불합리하게 위험을 전가하는 경우가 있다면, 적극적으로 법에 따라 시정되어야 한다. 쟁의행위도 마찬가지이다. 노동기본권 행사이고 민주화를 위한 것이라면 사소한 폭력과 불법에는 눈감아야 한다는 인식은 오해요 잘못이다.

지난 2월 독일 공항근로자의 파업이 있었다. 공항에서 목격한 노동조합의 쟁의행위는 휘슬을 불어대는 정도였다. 신체적 충돌이나 경찰 등과의 대치는 없었다. 더 놀라운 점은, 시민들의 담담한 반응이었다. 숙소를 다시 구해야 했고, 회의 일정도 순연시켜야 했던 것은 필자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불편해하는 기색은 없었다. 우리나라에서라면 어땠을까. 파업 시작 전부터 정부와 언론은 난리법석일 것이다. 헌법상 보장된 노동기본권인데도 말이다. 막상 파업이 개시되면 사업장과 도로를 불법적으로 점거하는 일은 다반사다. 그 와중에 경찰과의 몸싸움도 벌어질 것이다. 언론과 정부는 또다시 난리법석이 된다. 그걸 바라보는 국민의 눈은 찌푸려진다. 파업이라도 불법으로 도로를 막아선 것이라면 독일 시민들도 분노했을 게 틀림없다. 환자들이 입원해 있는 병원 안에서 노동운동가를 크게 틀어 놓고, 투쟁을 외치는 모습을 노동자의 천국이라는 독일에서 정작 본 적이 없다.

단언컨대 노동운동의 사회적 영향력은 지속되어야 한다. 그러자면 국민들의 공감과 지지는 필수다. 노동의 법치는 그래서 중요하다. '법대로'만을 고집해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그래서도 안 된다. 노동‘법’은 원래 이데올로기법이다. 탈이념화된 노동법은 더 이상 노동법이 아니다. 그래도 이데올로기의 과잉만큼은 바로잡아야 한다. 아무리 절박하더라도 목적이 수단을 항상 정당화하는 시대는 이미 지났다.


권혁 부산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